
선지서
이사야
[성경의 축소판], [구약의 복음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이사야서!
저는 이번에 이사야서를 번역하면서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이보다 솔직히
표현한 글이 또 있을까? 하나님이 얼마나 애가 타셨으면,
모든 체면 다 내려놓고, 이토록 진솔하게, 이토록 여과없이,
이토록 구구절절이 표현하셨을까?’란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그러면서 장장 66장에 걸친 이사야서의 내용이 이렇게 요약되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지? 넌 아마 상상도 못할 거야. 내가 그토록 널 사랑했는데 넌 어떻게 이렇게 날 배신할 수가 있니? 날 어떻게 이렇게 헌신짝 내버리듯 버릴 수가 있냔 말야. 네가 날 떠나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니? 그게 패망의 길이란 걸 왜 몰라? 정말 미워 죽겠어!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구나! 네가 계속 이러면 내가 회초리를 쓸 수밖에 없잖아! 그렇게라도 해서 널 살려야 하지 않겠니? 세상에! 그렇게 혼나고도 정신을 못 차리네! 넌 정말 구제불능이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도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내 아들을 보내 네 대신 징벌을 받게 해야지, 별 수 있겠니? 그렇게라도 해서 널 살려내고 봐야 하지 않겠어? 네가 아무리 날 배신하고 떠났다지만, 난 여전히 널 포기 못하니까. 널 향한 내 사랑은 도저히 포기가 안 되니까….”
네, 맞습니다. 이사야서를 읽다 보면 마치 중2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을 토로한 글 같단 생각이 듭니다. 미워 죽겠다고 했다가 어느새 다시 사랑한다 하고, 도저히 용서 못하겠다 했다가 금세 다시 용서해주겠다고 하고…, 그렇게 ‘어르고 달래고’를 수없이 반복하는 부모의 찢어지는 마음…! ‘미워 죽겠다’고 하시는데 실은 그게 ‘사랑한다’는 표현임을, ‘도저히 용서 못하겠다’고 하시는데 실은 그게 ‘빨리 돌아오라’는 뜻임을… 왜 예전엔 미처 몰랐을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사야서에 계속해서 나오는 ‘재난에 관한 메시지’ 때문에 이사야서를 그리 즐겁게 읽지 못하는 게 사실인데요, 저는 이번에 이러한 ‘재난 경고문’들이 실은 하나님의 사랑 고백이었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사야서에는 특별히 ‘Redemption’이란 단어가 많이 나오죠. 이걸 흔히 한국어로는 ‘속량, 구속, 대속’ 등의 단어로 번역하지만, 저는 이 용어들이 왠지 마음에 화악 와닿지 않는 것 같아 ‘하나님이 값을 치르고 우릴 되사셨다’라고 나름대로 번역해 보았습니다.
“난 널 되사오는 데 엄청난 값을 지불했단다.
온 애굽을, 그 소중한 구스와 세바를 다 털어 넣었단다. (올인^^)
넌 내게 그 정도로 값진 존재란다!
내가 그 정도로 사랑하는 존재라구!
널 되찾을 수만 있다면, 난 온 세상을 다 팔아도 아깝지 않아.
너를 얻을 수만 있다면, 난 온 우주를 포기해도 억울하지 않지.” – 사 43:3-4
또 이사야서에는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내가 바로 하나님이야!’라는 증거를 제시하시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데요(사 41:21-24, 43:9, 44:7, 45:21, 48:6-7), 그것은 바로 ‘잘 봐! 내가 예언한 대로 다 성취됐잖니? 이렇게 예언한 대로 성취할 수 있는 신이 세상에 나 말고 또 누가 있어?’라는 표현이죠. 그 중에서도 압권인 것은, 바로 바사 왕 고레스에 관한 예언인데요, 고레스가 출생하기 무려 150년 전에 ‘고레스’라는 이름 석 자까지 정확히 예언하신 걸 보면, 과연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심을 검증하는 ‘빼박 증거’란 생각이 드네요.
한편, 성경에 나오는 1,817개의 예언 중 96%의 예언이 이미 성취가 되었고, 4%만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는데, 그 4%의 예언은 모두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것이라고 하죠. 그런데 이사야 24장에 나오는 ‘지구인들로 인해 오염된 지구’라는 소제목이 붙은 단락을 보면, 요즘 지구촌 곳곳에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을 너무도 정확히 예언한 게 아닌가 싶더라구요. (소오~름^^)
그런가 하면, 우리가 이사야서를 읽기 어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가 ‘지금 이 말이 누가 누구에게 하는 건지’ 애매모호함-화자가 불분명함-때문인데요, 그래서 저는 마치 연극 대본처럼, 모든 대사마다 화자를 표시했으니 편하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꿀 뚝뚝 연애편지’인 이사야서를 읽으시면서, 우릴 향한 하나님의 애끓는 사랑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
저는 예레미야를 번역하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들을 해 보았습니다.
1. MZ세대 예레미야
“내가 널 모태에서 빚기 전부터 난 너에 관한 모든 걸 알고 있었단다. 네가 세상 빛을 보기 전부터 널 위한 거룩한 계획을 갖고 있었지. 널 향한 나의 계획은 바로 ‘너를 많은 나라들의 선지자로 세우는 것’이었어.”
“저를요? 주 하나님! 제 꼴 좀 보세요. 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걸요? 전 한낱 어린아이에 불과하다고요!” (민증 확인 요망^^) – 렘 1:5~6
MZ세대에게 일을 시키면, 세 가지 질문이 돌아온다죠. “제가요? 이걸요? 왜요?” 그런데 자신이 어리다고 주장하는 예레미야가 비슷한 질문을 하네요. ㅋㅋ
2. 하나님의 아재개그
1) “예레미야야, 뭐가 보이니?”
“살구나무 지팡이 하나가 걸어 다니는 게 보여요.”
“그래, 잘 봤구나! …… 내가 네게 주는 말을 다 지켜 성취시켜 주마.” – 렘 1:11~12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살구나무(שקד; 샤케드)’를 보여주시면서, ‘내 말을 지키겠다(שקד; 쇼케드)’고 말씀하신 건 두 단어의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라죠. 하나님께서 MZ세대(?)인 예레미야에게 실물교육과 아재개그 기법을 동시에 사용해, 재미있게 교육시켜 주시네요.
2) “이번 언약은 예전 언약(내가 그들 조상의 손을 잡아 애굽에서 이끌고 나왔던 때 맺은 언약)과는 다를 거야. 그때 난 그들의 남편이 되어 결혼서약을 지켰지만, 그들은 서약을 깨뜨렸지.” -렘 31:32
하나님께서 자신을 굳이 이스라엘의 ‘남편(בעלתי; 바알르티)’으로 소개하신 이유는 이 단어가 ‘바알(בעל)’과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라죠. 즉,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남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바람을 피웠다는 걸 강조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아재개그가 아닐까요?
3.왔다리 갔다리, 하나님의 마음
예레미야에는 ‘범죄한 백성을 징벌하겠다’고 경고하신 하나님이, 곧 마음이 약해지셔서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회복시켜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난 그가 언제든 자유로이, 쉽게 내게 다가오게 해 줄 거야. 세상 어느 누가 그처럼 감히 초대도 안 받고 나의 임재 앞에 나올 수 있겠니?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난 너희 하나님이 될 거라는 거지.” –렘 30:21下~22
이 구절을 읽고 ‘당신의 백성들과 관계가 회복되어 함께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꿈꾸시며 환하게 ‘아빠 미소’를 지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지시지 않나요? 이로써 우리는 예레미야의 주제가 ‘징벌이나 저주’가 아니라, ‘축복과 소망’임을 알 수 있지요. (렘 29:11)
4.줄을 잘 서야!
‘실세가 누구인지 파악하고, 그쪽에 줄을 서야 성공할 수 있다’는 건 만고불변의 법칙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가 실세인지를 모르고 ‘백화점 신상으로 출시된 우상들’ 또는 당시 ‘지는 해’였던 애굽으로 라인을 갈아타는 우를 범했죠.
“너희 생각엔 이게 별 일 아닌 것 같지? 그렇지? ‘죄악 프로젝트’ 하나를 실패하면 또 다른 프로젝트를 론칭하는 게? 하지만 애굽도 너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말 걸? 앗수르가 그랬던 것처럼 말야.” -렘 2:36
우리도 줄을 잘 서야 할 것 같네요. 진정한 실세이신 하나님께로 말이죠. (줄을 서시오~!^^)
5.대탐소실(大貪小失)
예레미야에는 거짓선지자들에 대한 경고가 많이 나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그들은 도대체 얼마나 강심장이기에,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거짓 메시지를 전했을까?’란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그러면서 한편으론, 성경이 그들을 여전히 ‘선지자’라 불러주는 걸 보면, 그들 역시 처음에는 선지자로 소명을 받았지만, ‘과도한 인정욕구’로 인해 결국 이런 괴물로 변해 버린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예전에, ‘사역자들은 하나님께만 올인하겠다며, 자기 삶을 드릴 정도로 헌신된 사람들이니, 당연히 탐심은 없겠지’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사역자가 되고 보니, 사역자들의 세계(물론 저 포함)에도, 여전히 ‘세속적 가치관’이 존재하더군요.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그 가치가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알았기에 전재산을 들여 그 밭을 샀던 것처럼, 우리도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면 세상적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을 텐데, 우린 여전히 세상의 짜잘한 것들에 현혹되어 ‘하늘나라라는 엄청난 가치’를 놓치는 ‘소탐대실(小貪大失)-최악의 거래’를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진실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는 한 끗 차이임을 잊지 말자’고 스스로 경각심을 가져 봅니다.
우리 함께 예레미야를 묵상하면서 ‘소탐대실(小貪大失)’이 아닌, ‘대탐소실(大貪小失)’의 삶을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레미야애가
예레미야애가의 히브리어 성경 명칭은 ‘에카(אֵיכָה)’라고 하지요(신기하게도 한국어 ‘애가’와 발음이 비슷하네요). ‘에카(אֵיכָה)’는 ‘어찌하여, 아, 슬프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 단어가 1장, 2장, 4장의 첫 구절에 나오더군요. 저는 이 말을 한국적인 정서를 감안,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로 번역했습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이렇게 깊은 탄식으로 시작할 정도로,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슬픈 노래지요.
B.C. 586년, 남유다가 멸망하면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참혹한 현실을 마주하며, 그 슬픔을 노래한 예레미야애가를 통해, ‘고통은 인간 삶의 불가피한 주제’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 삶에 끔찍한 고통이 지속될 때, 우린 종종 이런 의문을 갖는 게 사실이죠.
“하나님은 쌔디스트(Sadist)신가? 나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즐기시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왜 나를 이 고통에서 건져 주시지 않을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러한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지요. 그중 하나가 ‘선한 능력으로’라는 노래 가사를 쓴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님인 것 같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 암살 모의죄’로 투옥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에서, 1944년 성탄절 날, 약혼자에게 마지막으로 쓴 편지 내용이 바로 ‘선한 능력으로’라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종전을 한 달여 앞둔 4월 9일, 39세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하죠.) 저는 본회퍼 목사님이 이토록 극심한 절망과 고통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선하다고 할 수 있었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 같으면 낙심한 채로 하나님을 원망할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런데 예레미야도 같은 고백을 하더군요. 그게 바로 ‘예레미야애가의 주제 구절’이라 불리는 3:19-24입니다.
“난 이 고난, 이 박탈을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내가 맛본 재(ashes), 내가 삼킨 독을….
난 생생히 기억해. 바닥을 치는 느낌이 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하지만 또 하나 내가 기억할 것, 그리고 기억하고 있는 게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소망을 놓지 않는 것’!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은 다함이 없다네.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은 마르는 법이 없지.
(사해물과 시온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
주님의 사랑, 아침마다 새롭게 피어나고 주님의 의리, 더할 나위없이 크구나.
난 하나님께만 꼭 붙어 있을 거야(끊임없이 되새길 말)! 내겐 주님밖에 없으니까!”
-애 3:19-24
민족의 멸망 앞에 절망하던 예레미야 선지자도, 돌에 맞아 죽어가던 스데반 집사님도, 그리고 감옥 안에서 교수형을 기다리던 본회퍼 목사님도, 공통적으로 바라본 게 있다면 그건 바로 ‘고통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공통적으로 붙들었던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의리에 대한 믿음’이었고요.
예레미야애가를 번역하면서 저는 예레미야애가의 주제가 바로 ‘가오 있게 살자’임을 깨달았습니다. 유명한 영화 대사인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를 영어로는 ‘We may not have money, but we have class.’로 번역했더군요. 원래 ‘얼굴’이란 뜻을 가진 일본어 단어 ‘가오(かお)’가 우리나라에서 ‘클래스가 다른 품위와 당당함’을 뜻하는 유머러스한 표현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예레미야애가를 읽으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고난 가운데에서도 ‘가오’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다름 아닌, ‘고통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고난마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갖는 것’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에스겔
에스겔서에는 정말 많은 환상과 표징, 그리고 비유가 나오지요. 그래서 저는 지금껏 에스겔서가 참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번역을 하면서 자세히 보니, 이러한 하나님의 “시청각 자료” 덕에 에스겔서가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역동적이며, 깊은 인상을 주는지 새삼 느껴지더군요. 즉 글로만 이루어진 책보다는, 생생한 화면과 영상자료에 익숙한 우리 현대인들을 위한 맞춤형 성경이란 생각이 들었지요.
이렇게 많은 표징과 비유가 사용되다 보니, 등장인물들이 좀 특이합니다.
예를 들면 “모시옷 필통남”과 “측량맨”도 나오고요,
무엇보다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활동한 에스겔이야말로 참 많은 배역을 담당하고 있지요.
예를 들면, “어쩌다 경비병, 얼떨결에 인질, 부득불 농아(훗날 극적으로 회복), 화가로 급 등단, 졸지에 미니어처 제작자, 부지중 판토마임 연기자, 필연적 욕창 환자, 얼결에 파티쉐, 어쩌다 노점상, 노련한 협상가, 가수로 급데뷰(장송곡 전문), 자급형 이발사(중도 못 깎는 제 머리를 깎음), 길거리 버스킹 공연자, 메소드 연기자, 퀴즈쇼 진행자, 급 임명된 도로공사 사장, 얼결에 간판업자, 청천벽력 홀애비, 급파된 보초병, 급 부상한 인플루언서, 어쩌다 건축 설계사, 기억력 천재(IQ 375), 잠수 탄 수영선수 등등”입니다.
대부분의 선지서가 그렇듯, 에스겔서에도 “하나님의 반전매력”이 끊임없이 부각됩니다.
1) 우선,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진노하신 하나님이 그 실상을 낱낱이 폭로하십니다. 16장의 “신부를 사랑해 모든 걸 바쳤으나 끝내 배신당하고 만 재벌남의 애절한 호소”라든가, 아니면 23장의 “오씨 자매 주인공의 19금 막장드라마” 등이 그 대표적인 이야기지요.
2) 그리고 이러한 죄에 대한 징벌로 전쟁, 기아, 질병, 천재지변 등을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20장의 산불 이야기는 이번 LA산불과 어쩜 그렇게 흡사한지…
소오오름…..!
“잘 듣거라, 나 하나님의 메시지다.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네 안에 불을 놓으련다. 모든 나무를 홀라당 다 태워버릴 불을…. 죽은 나무든, 산 나무든 가리지 않고 다 태워 버릴 불, 아무도 끌 수 없는 불, 남에서 북까지 온 나라를 태워 버릴 불을…. 그제야 비로소 모두가 깨닫게 되겠지. 결코 꺼지지 않는 이 불을 놓은 장본인이 바로 나 하나님임을….” -겔 20:47-48
3) 하지만 마음이 약하신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그 예로 20장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수차례 반복해 나오죠.
“난 ‘애굽에서 지금 당장 그들한테 내 진노를 쏟아부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심한 끝에 결국 더 좋은 결정을 내렸어. 내 감정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내 성품에 따라 행동하기로 말야.”
이처럼 에스겔서의 결론이자 주제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회복”입니다! 할렐루야!
“내 종 다윗이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 될 거란다. 그들 전체가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거란다. 내가 그들과 평화협정을 맺으련다. 이 세상 만물에 적용되는 영원한 언약을 맺으련다. 내가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련다. 또한 그들의 삶 중심에, 내게 예배하는 성소를 마련해 주련다. 영원, 영원히! 바로 거기서 내가 그들과 함께 살련다. 그렇게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거란다!” -겔 37:25-27
여러분도 메시지 성경 [에스겔] 번역본을 읽으시면서,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나 죄에 빠져 살던 우리를 끝내 포기 못하시고, 아름답게 회복시키기 위해 “열심을 내시는(겔 39:25)” 하나님의 사랑에 포옥 빠져 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1위! 그건 아마도 [다니엘]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니엘서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죠. 위기에 빠진 주인공들이 믿음으로 승리하는 대반전의 스토리들도 정말 흥미진진하지만…, 무엇보다… 주인공들이 너무나 완벽해요!
외모, 학벌, 집안, 지능, 인격, 영성 등 뭐 하나 빠질 게 없는 ‘원조 엄친아’인 다니엘과 세 친구는 요즘 말로 ‘사기캐(게임용어, 사기 캐릭터-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듯한, 너무나 완벽하고 능력있는 캐릭터)’인 게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네 젊은이에게 이론이든, 실무든, 모든 면에서 우수한 지식과 기량을 주셨어요. 그 중에서도 다니엘은 각종 환상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은사를 받았지요. 왕이 정한 연수 기간을 마친 후, 왕궁 비서실장은 네 젊은이를 느부갓네살한테 데려갔어요. (연수원 탑4^^) 왕은 그들을 대상으로 면접시험을 시행했어요. 그런데… 이럴 수가! 그들이 다른 젊은이들에 비해 얼마나 월등하고 탁월했는지!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와의 대결에서 당해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답니다. (바벨론 멘사에 즉시 가입^^)” – 단 1:17-19
우리는 이렇게 완벽한 스펙의 다니엘의 매력에 자신도 모르게 쏙 빠져들게 됩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다니엘서를 읽으면서 다니엘과는 너무나 비교되는, 우리 자신의 그저 그런 모습에 주눅이 드는 것도 사실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완벽한 다니엘에게도 해결되지 않은 아픔과 열등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본인이 식민지 백성, 즉 바벨론의 포로라는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이건 외적인 열등감에 불과합니다.
그의 더 깊은 내적, 영적 아픔은 ‘일찍이 하나님께 선택받았던 자기 민족이, 그 영예로운 신분을 잃고,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사실이었던 거죠. 그래서 그는 조국을 위한 기도를 너무나 간절히 드립니다. (저는 이 부분을 번역하면서 얼마나 울컥했는지 모릅니다. 다니엘이 자기 민족의 타락상을, 뼈아픈 심정으로 회개하면서…, 그래도,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긍휼하심을 너무나 애절하게 구하고 있는 장면이 그렇게 감동적일 수가 없었거든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계시에 경고하신 대로, 지금 저희에겐 총체적 재난이 임했습니다. 무시무시한 재앙이 임했죠. 그도 그럴 것이, 저희는 주님께 1도 관심이 없이, 그저 죄짓기에만 바빴으니까요. 주님이 분명히 경고하셨기에, 주님은 그 경고대로 저희에게 재앙을 사정없이 쏟아 부으실 수밖에 없었죠. 우리 하나님, 저희가 이렇게 끊임없이 반역하며 주님을 무시했으니, 주님이 그러시는 게 당연합니다. 주님은 마땅히 그럴 권리가 있으시다는 것도 잘 알고요.
하지만 주님, 주님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잖아요? 주님이 갖가지 권능을 보여주시면서 주의 백성을 애굽(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셨던 거, 저희가 아직도 얘기한답니다! 한편 저희가 죄인이고 악한 삶을 삶았다는 것도 저흰 잘 알지요. 하지만 주님은 지금껏 그 어떤 상황이건, 그 어떤 죄인이건 다 바로잡아 주시려 최선을 다하셨으니, 이제 예루살렘-주님의 성읍, 그 주님의 거룩한 산-을 향한 진노도 제발 멈춰 주세요!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난 게, 다 저희와 저희 조상들의 죄 때문이란 거, 저희도 잘 알아요. 그래서 지금 저희가 주변 사람들한테 수치를 당하고 있다는 것도요. 저희는 지금 이 지역의 수치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발 들어주세요, 하나님! 주님 종의 이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세요. 주님의 무너진 성소에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저희의 성품을 보고 행동하지 마시고, 주님의 성품에 따라 행동해 주세요.” – 단 9:13-17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우리의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심금을 울리는, 진심어린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70 이레(70주)’에 대한 예언이죠. 물론 이 ‘70이레’ 예언은 해석이 너무도 다양해 많은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학계의 ‘뜨거운 감자’라서…
저는 감히 이에 대한 해석을 할 엄두도 못 냅니다만,
그래도 제가 이 본문을 통해 이번에 확실히 깨달은 게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다니엘보다 훨씬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무너진 예루살렘과 성전-을 놓고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지금 이렇게 무서운 기세로 세상을 정복한 강대국들? 천하를 호령하는 그 콧대 높은 왕들? 그거 다 별 거 아냐! 그들 모두 내 손안에 있으니까! 세상 나라들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해. 하지만 나의 왕국, 나의 백성들은 영원히 존속되지. 그러니 세상을, 역사를, 크게 보거라. 그리고 안심하거라. 결국 나와의 의리를 지키는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게 될 테니…..” – 단 9:20-12:13 요약
여러분도 이번 [다니엘서] 메시지 번역본을 통해, ‘역사의 진정한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깊이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P. S. 여러분이 일일이 자료를 찾지 않아도, 보다 쉽고 깊이 있게 [다니엘서]를 이해하실 수 있도록, 도움이 될 만한 도표와 삽화들을 많이 넣어 봤습니다. (여러분의 시간은 소중하니까요!^^)
호세아
어쩌면… 성경 66권 중 가장 충격적인 내용을 담은 게 바로 [호세아]가 아닐까요?
[호세아]는 그 도입부터 너무 쇼킹합니다. 선지자한테 ‘창녀와 결혼해 그녀와 자녀를 낳으라’고 명하시다니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보다 생생하게 전하기 위한 ‘예시’로 결혼을 하라니요? ‘신성한’ 결혼을 이렇게 ‘아무렇게나 막’ 해도 되는 걸까요?
눈에 콩깍지가 씌어 ‘이 사람 아니면 죽고 못 산다’며 하는 결혼도 얼마 못 가 ‘이혼을 하네 마네’ 하는 게 다반사인데, ‘출신이 미천하고, 천박하고, 무식하고, 가난하고, 바람기 다분하고, 도덕성이라고는 1도 없는, 밑바닥 인생 창녀랑 결혼한다는 건,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는 수치이자, 딱 봐도 고생길이 훤한 결혼이 분명한데…, ‘신성한’ 결혼을 이렇게 ‘아무하고나 막’ 해도 되는 걸까요?
이런 면에서 저는, ‘사랑 없이, 사명감만으로’ 결혼한 호세아가 정말 불행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호세아의 결혼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보다 생생하게 전하기 위한 ‘예시’가 아니었나요? 즉, 창녀처럼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우리를 신부로 맞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한 예표가 아니었냐는 거죠.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게 하나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지도 않는데, [하나님]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억지로, 우리와 막장 결혼을 하신 건 아니다’라는 사실이죠.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에 눈이 머셔서, 고놈의 사랑 때문에”,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시면서까지, 우리를 ‘순결한 신부’로 신분세탁해 주시면서까지, 굳이 우리와 부부의 연을 맺으셨다는 거죠.
그렇다면, 당신을 끊임없이 배신하고 불륜을 저지르는 우릴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과연 불행하실까요? 전 그렇지 않을 거라 확신합니다.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중략)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유치환, ‘행복’ 중에서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기 위한 ‘예시 인물’이었던 호세아 역시 창녀 아내 고멜을 ‘진심으로’ 사랑했을 거라는, 그래서 그의 결혼생활 역시 참 행복했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사랑하는 것만큼 아픈 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만큼 행복한 것도 없죠. 그러기에 ‘우리와 사랑에 빠져 너무나 행복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사랑고백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녀를 광야로 다시 데려가려 해.
우리가 첫 데이트를 했던 곳으로 말야.
거기에서 그녀에게 장미 꽃다발을 주며,
난 다시 사랑 고백을 할 거야.…..
난 너랑 결혼할 거야. 그렇게 영원한 부부로 사는 거지.
내가 널 나의 정식 아내로 맞이할 거야. 진심으로, 사랑과 온유로!
그래, 난 너랑 결혼해 널 떠나지도, 네가 날 떠나게 하지도 않을 거야.
그럼 네가 나, 하나님을 알게 되겠지? 내 진면목을 보게 되겠지? – 호 2:14, 19~20
여러분도 메시지 성경 [호세아] 번역본을 읽으시면서, 하나님의 ‘쇼킹한 사랑’을 찐하게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요엘
요즘 자주 대두되는 이슈 중 하나가 바로 ‘소통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소통’과 ‘소외’가 똑같이 ‘疏(트일 소)’라는 한자를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소통은 ‘트임(疏)’에 ‘연결(通)’이 더해져, ‘트인 마음으로 상대와 연결됨’이라는 긍정적 의미를 갖고 있는 반면, 소외는 ‘트임(疏)’에 ‘바깥(外)’이 더해져, ‘상대와의 연결이 끊기고 외부로 밀려나 고립됨(아싸-아웃싸이더)’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갖고 있죠.
그리고 ‘소통’이란 화두가 제기될 때마다, 꼭 등장하는 단골 소재가 바로 ‘세대차이’라는 데엔 누구나 다 동의하실 텐데요(유일하게 세대 간에 의견이 일치되는 부분^^), 이러한 시대적 조류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요즘 말’이 바로 ‘꼰대’일 것입니다. (‘꼰대’의 사전적 정의: 권위적이고 고집스러운 태도로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연장자, 하지만 나이에 상관없이 이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을 포괄적으로 일컫기도 함.)
그런데 저는 이번에 [요엘]을 번역하면서, 이러한 ‘세대 간의 소통’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실버 세대’와 ‘MZ 세대’가 똑같이 하나님의 영을 받게 될 때, 우리는 ‘세대를 초월해’ 동일한 꿈과 비전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모든 민족에게 부어줄 거란다. 그럼 너희 아들들이 예언할 거야. 딸들도 마찬가지고…. 실버 세대들이 꿈을 꾸고, MZ 세대들이 비전을 보게 될 거야.” – 욜 2:28
하지만 누가 뭐래도 [요엘]의 클라이맥스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욜 2:31)’ 부분일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선지서의 맥락이 그렇듯, [요엘]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심판 그 자체’보다 ‘심판을 피할 수 있는 비결’을 훨씬 더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나 하나님의 심판날이 닥치기 전에, 그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누구든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외치면 구조를 받을 거야. (하늘나라 소방대원 대거 출동^^) 나 하나님이 말했듯,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대규모 구원이 있을 거야. (역대급 구출작전^^) 궁금하지? 누가 그 대열에 낄 수 있을지…? 물론, 나 하나님이 (콕 찍어^^) 부른 자들이지!” - 욜 2:31~32
여러분도 [요엘]의 메시지 번역본을 읽으시면서, ‘나를 불러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나를 구원해 주실 하나님을 향한 간구’로 하나님과 ‘탁 트인 소통’을 해 보시길 바랍니다.
아모스
요즘 많은 이들이 “YOLO”를 모토 삼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YOLO”는 “You Only Live Once”의 줄임말로, “인생은 한 번뿐이니 기회를 놓치지 말고 지금을 즐기자”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그런데 이 YOLO족이 우리 시대에 갑자기 출현한 게 아니라, 오랜 옛날(적어도 B.C. 8세기, 아모스 시대)부터 존재했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큰일났구료. 내일이 없다는 듯, 오늘 하루를 위해서만 사는 이들이여! 남들의 고난은 안중에도 없는 자들이여!” – 암 6:3~4 (메시지 성경)
그런가 하면, 예수님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당시의 YOLO족들을 비판하셨고요.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소.
‘어리석구나. 오늘 밤 네가 죽을 줄도 모르고…. 네가 죽고 나면, 창고 가득 쌓아 놓은 저 곡식들이 누구 차지가 될까?’” - 눅 12:20 (메시지 성경)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이렇게 결론지으셨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자신의 창고를 하나님이 아닌, 자아로 채울 때 일어나는 일이라오.” - 눅 12:21 (메시지 성경)
✭ ✭ 여기서 잠깐, 깜짝 퀴즈! ✭ ✭
Q 내일을 생각지 않고, 오늘의 쾌락만 좇는 YOLO에서 탈출할 수 있는 비결은? (위의 본문-눅 12:21-을 참조해 답하시오.)
A 자신의 창고(마음)를 하나님으로 채움
Q 이러한 삶의 태도를 라틴어로는 뭐라고 할까?
A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Q 갈라디아서 6장에서 바울은 “YOLO”와 “코람 데오”의 삶을, 어떻게 대조해 설명했나?
A 착각하지 마세요. 아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어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거두어 주신답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건 사실 하나님을 아랑곳하지 않는 거예요.) 이기심의 씨앗을 심는다면 잡초만 거두게 될 거예요. 본인의 인생을 결산할 때, 남는 거라곤 잡초뿐일 거라구요! 하지만 하나님께 순종의 씨앗을 심는 사람은, 그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직접 그 씨앗이 자라나게 해 주시기 때문에 진정한 삶, 영원한 삶을 거두게 되죠. – 갈 6:7-8 (메시지 성경)
Q 위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A 순간의 쾌락을 위해 살면 아무것도 남지 않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Q 아모스 선지자가 표현한 YOLO의 전형적인 모습은? (아래의 말씀을 읽고 답하시오.)
“아침 제사 때마다 바치는 제물? 3일에 한번씩 바치는 십일조? ‘감사제’랍시고 흠 없는 제물을 태워 드리는 것? ‘자원제’랍시고 큰소리치며 드리는 것?
이게 바로 너희 이스라엘이 그리도 좋아하는 ‘종교쇼’가 아니고 뭐란 말이냐?
너희도 알지? 너희 냉장고를 텅텅 비우고 너희 찬장을 싹 다 털어간 게 나라는 걸…?
설마 모르는 건 아니지?
너희를 배고프게 만든 건 누굴까? 빵 한 덩이 얻기 위해 배급줄을 서게 만든 건…?
너희가 빵은 그렇게 갈망하면서도, 정작 나를 갈망한 적은 한번도 없었잖아?
줄곧 그렇게 나를 무시했잖아?” – 암 4:4b-6 (메시지 성경)
A 하나님을 무시함
Q 아모스 4장에서 “너희가 나를 무시했다”라면서 하나님이 속상해하시는 장면이 몇 번 나올까?
A 다섯 번 (4:6, 4:8, 4:9, 4:10, 4:11)
Q 그렇다면, YOLO와 반대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란?
A 하나님을 존중하는 삶
Q ‘하나님을 존중하는 삶’의 실질적 모습은 무엇일까? (다음의 암 5:24 말씀을 읽고 답하시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아니?
바다처럼 넘실대는 정의의 파도,
강처럼 유유히 흐르는 공의의 물결!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야! 내가 원하는 건 그뿐이라고!” – 암 5:24
A 정의와 공의
***
여러분, 눈치채셨나요? 여러분이 위의 퀴즈들을 푸시는 동안, 어느새 [아모스]의 결론에 도달하셨다는 사실을요? 네, [아모스]의 결론이자 핵심은 바로 “정의와 공의”입니다!
여러분도 [아모스]의 메시지 성경 번역본을 읽으시면서, 하나님을 존중하는 삶, 즉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
P. S. 여러분, 혹시 알고 계셨나요? [아모스]에 “소는 누가 키우나?”란 질문의 배경이 나온다는 사실을요?^^
“난 원래 선지자 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소. 애초부터 그냥 시골에서 소나 키우고 뽕나무나 가꾸던 사람이오. 그러던 날 하나님이 농장에서 불러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한테 내 말을 전하거라.’” (소는 누가 키우나?^^) – 암 7:14b-15
혹시 다음 관계들의 공통점을 찾으실 수 있으신가요?
“아벨과 가인, 라헬과 레아, 요셉과 그의 형들, 모세와 미리암 및 아론, 마리아와 마르다, 탕자와 그의 형”
네, 맞습니다. 모두 형제 사이지만, 그닥 형제애가 돋보이지 않는 (심지어 질투, 미움, 훼방, 살인으로까지 번진) 관계들이죠.
우리 속담에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듯, 가까운 사이일수록 질투의 마음은 더 큰 것 같습니다. ‘워렌 버핏이 주식으로 수 조원을 벌었다’는 뉴스엔 덤덤하던 사람이 ‘가까운 사람이 주식으로 수 억원을 벌었다’는 소식엔 배알이 꼴리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하나님께서는 [오바댜]를 통해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스라엘의 형제국인 에돔에게 분통을 터뜨리십니다.
"그날, 넌 팔짱 끼고 서서, 수수방관했잖니?
이방인들이 네 형제(야곱-역자 주)의 군대를 포로로 잡아가던 날,
불경건한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침략해 약탈하던 날
넌 강 건너 불구경각으로 무심히 서 있었잖니
너도 그들과 똑 같은 악질이야
네 형제(야곱-역자 주)가 폭망할 때 그렇게 좋아하며 낄낄거리다니…,
이건 정말 아니잖아
유다의 아들들이 진흙탕에 처박힐 때그렇게 비웃고 조롱하다니
이게 말이 되냐고
그들은 세상이 무너지는데 그렇게 큰소리치며 좋아하다니
이게 사람이 할 짓이냔 말야
그들의 삶이 무너졌을 때 그 틈을 타되려 이득을 챙기다니
그게 형제로서 할 짓이야
그들이 고난을 당한 걸 가지고그들 나라가 망한 걸 가지고 온백성이 고소해하다니
이게 말이 되냐고
그들이 완전히 무너져 무방비 상태가 되었을 때그들에게서 옷까지 벗겨 가다니
그건 정말 너무하잖아
몰래 진치고 있다가 도망치는 그들을 막아서다니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모든 걸 잃은 무력한 생존자들을 배신해 넘겨주다니
이야말로 천인공노할 일이 아니냐고?" -옵 1:11~14 (메시지 성경)
그렇다면 우린 왜 가까운 사람에게 더 쉽게 질투심을 느낄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와 나의 출발선이 비슷하다’는 전제 하에 비교의식을 갖고 있다가, 그가 나보다 더 잘 나갈 때, 상대적인 열등감을 더 강하게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이러한 질투는 우리의 가치를 ‘존재’에 두지 않고 ‘소유’에 둘 때 발생하는 것이죠. (에릭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사상을 살짝 빌려 써 봤습니다.^^)
그렇다면 가까운 사람을 질투 없이, 사랑하는 방법은 뭘까요?
제 생각엔 (좀 극단적이긴 합니다만…) ‘만약 그가 죽고 없다면..?’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럼 대부분의 경우, ‘그래도 그가 내 곁에 있는 게 좋다’란 생각이 드실 걸요? 그제야 비로소 우리의 가치가 ‘소유’에 있지 않고, ‘존재’에 있다는 걸 불현듯 깨닫게 되실 테니까요.
여러분도 [오바댜] 번역본을 읽으시면서, “가까운 사람이 내 곁에 ‘존재’한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그의 ‘존재’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발견하시게 되길 기도합니다.
P. S. 여러분, 혹시 알고 계셨나요? 여러분이 [오바댜] 번역본의 1/3을 벌써 다 읽으셨다는 사실을요? 네, 위에서 잠깐 맛보기로 보여드린 [옵 1:11~14] 내용이 전체의 1/3이나 되거든요. 이참에 여세를 몰아 지금 바로 [오바댜]를 완독해 보세요!
요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가득한, 한 편의 동화 같은 성경 [요나]!
사실 [피노키오]란 동화도 구조나 주제 면에서 [요나]와 비슷한 게, 혹시 성경 [요나]에서 영감을 받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순전히 제 개인적 추측^^). 그래서 저 역시 그동안 [요나]의 주제를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된통 당한다’라고… 가볍게만 여겨온 게 사실이고요.
그런데 저는 이번에 [요나]를 번역하면서, [요나]가 생각보다 훨씬 ‘깊은 책’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요나서]의 배경과 내용은… 다음과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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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제사회의 강자로 떠오르던 앗수르는 이스라엘에게 큰 위협적 존재였음(실제로 북이스라엘은 훗날, 앗수르에게 멸망당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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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요나는 자기 민족의 숙적인 니느웨(앗수르의 수도)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게 싫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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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행여 그들이 회개라도 한다면…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 주실 게 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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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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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불순종한 요나는 괘씸죄에 걸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등 온갖 고생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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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정신차린 요나가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 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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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고비를 넘긴 요나는… 드디어 마음을 고쳐먹고, 니느웨로 가 회개를 촉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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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요나는 여전히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받는 게 탐탁치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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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하나님은 ‘박넝쿨 실물교육’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니느웨 백성을 중히 여기시는지 깨우쳐 주심(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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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갑자기 이야기가 뚝 끝나는 게… 좀 황당한 결말^^
그런데 이쯤에서… 제 머릿속에 두 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1. 요나가 하나님 명령에 불순종한 게 단순한 ‘민족감정’ 문제일까?
요나는 자기가 직접 ‘구원받을 가치가 있는 민족’과 ‘구원받을 가치가 없는 민족’을 결정했습니다. 즉 자신이 심판자가 된 거죠. 이는 인류 최초의 범죄인 ‘선악과 사건’으로부터 계속되어 온… 인류의 가장 근원적인 죄를 상기시킵니다.
피조물이 자기랑 같은 신분인 다른 피조물을 향해 ‘넌 선해, 넌 악해’라고 판단하는 것만큼 오만한 죄가 또 있을까요? 왜냐하면 ‘내가 다른 사람들의 선악을 판단하겠다’는 마음은, 자신의 ‘피조물 신분’을 망각한 데서 비롯된 것일 테니까요.
즉, ‘심판자’이신 하나님 자리에 앉아, 하나님 행세를 하려는 참람한 태도! 이게 바로 인간 내면의 가장 뿌리깊은 근원적 죄가 아닐까요?
2. 훗날, 예수님은 이렇게 ‘불순종의 아이콘’인 요나를… 왜 굳이 당신의 ‘부활의 모델’로 삼으셨을까?
위에서 언급한 대로 요나가, 심판주의 자리를 넘보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이고도 무서운 죄를 드러낸 상징적 인물임에도, 예수님은 왜 굳이 요나를 통해 당신의 부활을 예언하셨던 걸까요?
이건… 예수님이 친히 ‘모든 인류의 죄를 담당’하실 것을 강조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즉 “요나처럼” 심판주 자리를 탐내는 죄를 포함한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돌아가셨다가 “요나처럼” 3일만에 부활하실 것임을 강조하셨던 것,
즉 “요나처럼” 뿌리깊은 죄성을 가진 사람이라도, 결국 “요나처럼” 새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려 했던 게 아닐까요?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요나]가 결코 쉽게 읽고 넘어갈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님을, [요나]야말로 성경의 맥과 핵(성경의 맥=구속사, 성경의 핵=예수 그리스도)을 압축해 놓은, 정말 ‘깊은 책’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메시지 성경 [요나] 번역본을 읽으시면서, ‘혹시 나도 요나처럼, 심판주 자리에 앉아 남들을 판단하고 있진 않나?’ 묵상해 보시는 계기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고 싶은데, 과연 얼마를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글쎄… 한 1000억원 정도면 좋아하실까요?
하지만 불행히도…
그렇게 ‘통 큰 헌금’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겁니다(우리의 절망 포인트 1번).
그런데 다행히도…
하나님이 1000억원 헌금보다 더 좋아하시는 게 있다네요(우리의 소망 포인트 1번).
미가 선지자가 귀띔해 주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방법’, 지금 바로 공개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로 서야 할까?
어떻게 해야 높으신 하나님 격에 맞는 예우가 될까? (간지나게^^)
제물을 한 트럭 가져 갈까?
그 위에 한 살배기 송아지 수십 마리도 함께 얹을까?
컨테이너 가득 수천 마리 양을 싣고 가면,
올리브유 수만 배럴을 갖다 바치면, 하나님이 감동하실까?
내 맏아들, 내 소중한 아기를 제물로 바치면, (금쪽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면서 내 죄를 없애 주실까?
아니지, 주님은 이미 분명히 보여 주셨는 걸?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찾으시는지….
그건 간단해! (두두두두… 정답 발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
사랑으로 따뜻하게 이웃을 대하는 것,
서로 의리를 지키는 것.
자신보다 하나님을 중시하는 것. – 미 6:6-8
미가 선지자가 열거한 어마무시한 제물들! 그걸 제가 현 시가로 환산해 보니 무려 1000억원이 넘더군요. 그런데 이런 거액의 헌금에도 시큰둥하시던 하나님이 갑자기 환한 ‘아빠 미소’를 지으시면서 감동하시는 게 있는데, 그게 바로 ‘공의, 사랑, 겸손’이라네요.
하지만 불행히도…
죄성을 타고난 우리는… ‘공의, 사랑, 겸손’을 실천할 능력이 없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시도를 해 보거나, 흉내를 내 볼 수는 있겠지만… 완벽히, 끝까지 실천할 사람은 아무도 없죠(우리의 절망 포인트 2번).
그런데 다행히도…
하나님께서 ‘플랜B’를 준비하셨다네요(우리의 소망 포인트 2번)!
미가 선지자가 귀띔해 주는 하나님의 엉뚱-기발-경악 플랜,
지금 바로 공개합니다!
하지만 너,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아!
작고 보잘것없는 너한테 (인정할 건 인정!^^)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니?
‘목자형 찐 지도자’가 네게서 나올 거란다.
그분은 갑자기 툭 튀어나온 분(갑툭튀^^)이 아니란다.
유서 깊은 가문,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지. (찐 성골^^) – 미 5:2
네, 바로 우릴 대신해 죗값을 치러 주실 그리스도를 예비하셨다는 거죠. 그리고 그 덕에 우리가 ‘죄인’에서 ‘의인’으로 ‘완벽한 신분세탁’이 된다는 겁니다(인류 최고의 희소식)!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다 용서해 주셨다면…, 이제 우린 막 살아도 되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관계’라는 키워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자가 한 신용불량자에게 카드를 주면서
‘어떤 빚이든 다 갚아 줄게. 이제부터 네가 쓴 건 내가 다 책임질게’라고 했다고 칩시다.
그 신불자는 ‘꿈인가, 생시인가’하며, 흥청망청 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기, 도박, 사치품, 술… 심지어 범죄에까지 물쓰듯 돈을 썼죠.
이 소식을 들은 부자가 말합니다.
“내가 빚을 갚아준다고 했지, 망가져도 된다고 하진 않았어.”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 죗값을 대신 갚아 주신 ‘사랑’의 결단입니다. 그걸 악용하면 그 사랑을 모욕하는 것이 되겠죠. 용서는 새롭게 살 기회를 열어 주는 문이지, 막 살아도 된다는 ‘범죄허가증’이 아니니까요.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의와 사랑’을 요구하시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행위’가 아닌, ‘관계’니까요.
여러분도 메시지 성경 [미가]를 읽으시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깊이 묵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나훔
여기, 사회적 물의를 빚은 한 유명인이 있습니다. 그가 눈물을 글썽이며 대국민 사과를 합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또 다시 비슷한 추행을 저지릅니다. 그때 국민들은 그의 눈물이 ‘악어의 눈물’이었음을 알고 배신감에 분노합니다.
여기, ‘40일 후에 이 성읍이 무너질 것이다’라는 요나 선지자의 경고를 들은 니느웨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판이 두려웠던 그들은 대대적인 금식과 회개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특별사면을 받습니다. 하지만 불과 100여년 만에 또 다시 거짓과 폭력과 약탈과 마술과 음행에 중독된 ‘피의 성읍’으로 변했고, 이번엔 하나님께서 나훔 선지자를 통해 그들에게 최후통첩을 하십니다.
-
우리는 왜 회개한 후, 동일한 죄를 반복해 짓는 걸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 회개에 진정성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런 ‘영혼 없는’ 회개를 하는 걸까요? 그것은 아마도 ‘일단 벌부터 면하고 보자’라는 임시방편적 태도 때문일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런 ‘눈 가리고 아웅’ 식의 형식적 회개를 하는 걸까요? 그것은 아마도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해, 죄를 경시하는 태도 때문일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런 ‘죄에 대한 불감증’이 있는 걸까요?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장난삼아 무작위로 수백 명에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고 합니다.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OO원의 돈을 송금해라.”
그런데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송금을 했다네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 중 하나는 감추고 싶은 나의 은밀한 죄가 만천하에 공개돼 나의 경력, 가정, 관계, 미래 등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게 되는 것일 겁니다. 혹은 죄로 인해 내 삶의 모든 것이 천천히 무너져 내릴 수도 있지요. 극적인 폭로든, 서서히 잠식당하는 것이든, 죄의 영향력은 정말 파괴적이고 무섭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죄를 직시하고 인정하는 게 너무 두려워 일단은 '회피'라는 가장 쉬운 방법을 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 아무리 내 죄를 덮으려 해도 그 죄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불편한 진실'이지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진정한 회개의 비결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시지 않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죠.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셨으면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그토록 처참하게 죽이심으로써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게 하셨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이 내 죗값을 대신 치러 주셨어. 나는 내 모든 죄에 대한 면죄부를 받았어'라며 여전히 죄를 짓는다면, 당신의 진심 어린 사랑과 희생을 '이용만 해 먹는' 우리를 보시며 하나님은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요?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는데요, 이처럼 죄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사실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고, 그래서 구원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가 아무리 진심으로 회개를 한다 해도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죄를 얼마나 아프게 여기느냐'에 있겠지요. 우리의 '죄에 대한 태도'야 말로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조건'이자,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증거'일 테니까요.
우리 함께 [메시지] 성경 [나훔] 번역본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그리고 형식적인 회개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는 절대 의문을 품어선 안 돼. 불평도 금물이야’라는 강박에 시달리곤 합니다. 하지만 하박국은 하나님께 솔직히 묻고, 거침없이 불평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유다에 악이 들끓는데, 주님은 왜 수수방관하고 계시나요?”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하박국의 이러한 거친 태도를 꾸짖기는커녕, 친절하게 답해 주십니다.
“머잖아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겠다.”
아, 이럴 수가! 이거 완전…. 혹 떼려다 혹 붙인 형국 아닌가요? 그 웬수 같은 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심판하시다니요? 이에 하박국이 기가 찬 듯 다시 따집니다.
“바벨론은 유다보다 훨씬 더 악한데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또 한번 대답하십니다.
“걱정 말거라. 내가 놀라운 반전을 준비해 놓았으니….
결국엔 내가 바벨론도 심판할 거다. 하지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거란다.”
그런데… 이게 반전이라면…. 문맥상, 여기에서 ‘의인’은 ‘유다’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요…?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악인’이던 유다가 어쩌다 갑자기 ‘의인’으로 둔갑한 걸까요? 하나님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하지만 나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자는, 충성된 마음과 굳건한 믿음으로 사는 자는,
살아 있는 거란다. 진짜 살아 있는 거라고! (생명력 빵빵^^)” – 합 2:4b
그렇다면,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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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이니까 ⟶ 믿음으로 사는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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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사니까 ⟶ 의인으로 여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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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의인으로 여김 받으면 ⟶ 참 생명이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은 또 뭘 뜻할까요?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규율을 완벽하게 준수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그런 식(규율을 완벽하게 준수함)으로는 관계유지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의 반증이지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것을 그저 끌어안음으로써 그런 관계를 유지하는 거랍니다. 하박국 말이 맞아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올바로 세워 주신다. 그리고 그거야 말로 참된 삶이다.’” – 갈 3:11 (메시지 성경)
이 말씀을 등식으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사는 사람
=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걸 그냥 끌어안는 사람
(≠ 규율을 완벽하게 준수하는 사람)
= 하나님이 올바로 세워 주시는 사람
= 참된 삶(참 생명)을 얻은 사람
***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것’이라는 건 또 뭘까요? 잘 알다시피,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의문이 드는군요.
하박국과 같은 구약시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믿었으며, 어떻게 의인으로 인정받고, 어떻게 구원을 받은 걸까요?
우리는 그 답을 구약성경 전반에 흐르는 메시아의 그림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메시야 예언이 약 300여 개가 나옵니다. 이러한 직접적인 성경말씀 외에도, 구약 시대의 성전, 제사, 절기, 대제사장 의복, 고엘(גֹּאֵל), 도피성 등 수많은 제도와 규례들까지 모두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미리 보여 주는,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구약은 예고편, 신약은 본방!) 즉, 구약 시대 사람들도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의인으로 인정을 받았고, 그 덕에 구원을 얻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행동이 믿음을 증명한다’는 사실 역시 강조합니다.
“그동안 구약 성경에서 내내 얘기하시던 말씀-‘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사람은 기필코 살 것이다!’-이 드디어 실현된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바로 세워 주시죠. 그리고 그들은 자기의 행동으로 믿음을 증명해 보인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죠!” – 롬 1:17 (메시지 성경)
이 말씀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하나님을 향해 거침없는 질문과 불평을 쏟아내던 하박국도 이젠 태도가 완전히 변해, 다음과 같은 고백으로 책을 마무리합니다.
“비록 벚꽃이 피지 않아도, 딸기가 익지 않아도, 사과에 벌레가 먹어도, 밀밭이 시들시들해도, 양 우리에 양 떼가 없어도, 외양간이 텅텅 비어도, 나는 여전히 기뻐하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렵니다. 나의 구원자 하나님 앞에서 기쁨의 재주를 넘으렵니다. 하나님의 승리의 통치를 내가 믿기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 보렵니다. 힘을 내 보렵니다. 사슴처럼 가볍게 달리렵니다. 산의 왕처럼 힘차게 달리렵니다.” – 합 3:17-19
여러분도 [메시지] 성경 [하박국]을 통해,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삶’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스바냐
많은 분들이 [스바냐]라고 하면 먼저 떠올리는 찬양이 있죠.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습 3:17)
그리고 자연스럽게 “스바냐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따뜻한 책이겠지”라고 ‘쉽게’ 결론 내리곤 합니다(아마도 스바냐가 자주 읽히는 책이 아니라서 더욱 그런 선입견을 갖기 쉬운 것 같아요). 하지만 놀랍게도, 스바냐는 ‘여호와의 날(יוֹם יְהוָה 욤 여호와)’을 선포하며 시작되는, 무시무시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여호와의 날’은 스바냐뿐만 아니라, 이사야, 에스겔, 요엘, 아모스, 오바댜, 스가랴, 말라기 등 여러 선지서에 반복해 등장하는 개념으로, 때로는 ‘크고 두려운 날, 심판의 날, 재앙의 날, 흑암의 날, 분노의 날, 보복의 날’ 등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게 뭔가 모순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성경은 분명 하나님을 ‘사랑’이라 강조하는데, 그런 하나님의 날, 여호와의 날이 재앙의 날이라니…. 이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닐까요?
많은 크리스천들이 회개를 통해 예수님을 처음 영접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엔 “예수님이 내 모든 죗값을 치르셨어. 나는 이제 ‘의인’이야.”라는 ‘안이한’ 믿음으로 쭉~ 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구약 선지서들의 ‘기-승-전-구원’이라는 문맥구조 속에서도, ‘기-승-전’은 건너 뛰고, 결론인 ‘구원’ 부분만 깊이 묵상하며 안심해 버리기 일쑤지요. 이런 이유로 스바냐 역시 우리 머릿속에 다음과 같은 결론(구원) 부분만 각인된 것 같습니다.
“너의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신단다. 너를 구원하실 강한 용사가 여기 계신단다. 네가 돌아온 걸 기뻐하시며, 그 사랑으로 널 달래시고, 그 노래로 널 즐겁게 하실 거란다.” – 습 3:17
분명, 사랑과 긍휼, 자비와 오래 참으심이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그 사랑은 ‘무조건 용납하는 감정’이 아니라, ‘의롭고 거룩한 사랑’이라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그저 악을 눈감아 주는 게 아닌, 악을 바로잡는 사랑이라는 거지요.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에 징계하듯, 하나님도 인간의 죄악과 불의를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은 단지 하나님의 ‘분노 폭발의 날’이 아니라, 오래 참으신 하나님께서 마침내 죄를 정리하시는 날, 그리고 억울한 자에게 공의를 회복시켜 주시는 날인 것입니다. 즉, 그 모든 악에 대해 "이제 그만!"이라고 선언하시는 날, 우리에게 다시 한번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날인 것이죠.
이쯤에서… 이런 얘기가 나올 법합니다. (사실 저도 영적으로 무뎌질 때면, 스스로에게 자주 하는 말입니다. ㅠㅠ)
“난 예수님을 영접할 때 회개했어. 성경에서도 내 모든 죗값을 예수님이 다 치러 주셨다고 했고. 난 이제 ‘의인’이야. 사실 내가 딱히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 나름 구제랑 봉사도 하고…, 굳이 내 죄를 찾자면….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한 죄’ 정도? 하나님의 ‘사랑의 기준’이 너무 높으시니…. 그 기준에 못 미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삶 아냐? 그런데 뭘 또 구구절절이 회개하라는 거지?”
바로 이런 태도가,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세상에서 비난받는 이유가 아닐까요?
값싼 회개, 값싼 용서, 값싼 은혜…
영화 ‘밀양’에서 아이를 유괴하고 살해한 납치범이 아이 어머니에게 “저는 하나님께 용서받았어요. 그래서 마음에 평안을 얻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뻔뻔스러운 태도…!
물론 우리 대부분은 유괴나 살인처럼 ‘명백히 드러난 죄’는 짓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찌 보면 더 무섭고 은밀한 죄-이를 테면 이기심, 교만, 위선 등-를 경시하는 ‘뻔뻔스러운’ 태도를 갖는다면, 우리가 그 유괴범과 다를 게 뭘까요?
진정한 회개는 단순히 죄책감을 느끼는 게 아닙니다. 죄 자체보다, ‘그 죄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어떻게 모욕했는지, 그로 인해 누가 고통받았는지’ 그 무게를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이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통렬한 돌이킴으로, 반드시 ‘책임과 변화, 그리고 희생을 감수하는 사랑’이라는 열매로 나타나지요. 만약 이러한 회개가 없다면, 우리가 말하는 ‘평안’은 ‘자기기만’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스바냐]를 읽으면서 ‘여호와의 날’에 담긴 하나님의 경고와 사랑, 그 하나님의 절규를 듣고, ‘진정한 회개’를 통해 ‘진정한 평안’을 회복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서, 형식이 더 중요할까요? 아니면 마음이 더 중요할까요?
네,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은 형식보다 마음을 더 중시하십니다. 실제로 ‘영혼 없는, 형식적인 종교생활’에 대해, 하나님께서 강한 반감을 표현하시는 내용이 성경 전반에 걸쳐 자주 등장하니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과연 희생제물일까요? 그냥 과시하려는 마음에, 빈껍데기 형식만 행하는 걸 과연 하나님이 원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원하십니다! 중요한 건… 그냥 말 그대로 순종하는 거라고요! 화려한 종교 행사로 자기자랑이나 하는 걸 원치 않으신단 말입니다.” – 삼상 15:22
“‘예배 쇼’는 이제 제발 그만! 그 따위 종교놀이, 정말 참기 힘들구나. 매월 열리는 컨퍼런스들, 매 주일의 특별 집회ㅡ집회, 집회, 집회들! 정말 더는 못 봐주겠다고!” – 사 1:13
“난 변치 않는 사랑을 원해! 허울뿐인 종교는 싫다고! 그러니 나,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집중해 주면 안 되겠니? 형식적인 종교 모임은 제발 그만!” – 호 6:6
“전 하나님을 예배하는 법을 배웠어요. 깨지고 상한 마음으로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된 삶. 그거야 말로 하나님의 눈길이 머무는 곳이죠.” – 시 51:17
예수님께서도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는 꼭 예루살렘에서 드려야 하나요?’라고 질문했을 때, 이렇게 대답하셨죠.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는지는 전혀 문제되지 않을 날이 오고 있소. 아니, 실은 이미 왔소. … 하나님은 그 존재 자체가 영이시라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은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예배해야 하오. 자기의 영혼을 담아, 참된 자아로, 경외심을 가지고 말이오.” – 요 4:22, 24
이러한 하나님이, 왜 [학개]에서는 굳이 성전건축을 그렇게 강조하셨을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개]가 씌어진 시대적 배경을 먼저 이해해야 할 것 같은데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정착한 후, 곧 성전재건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외부의 방해와 내부의 무관심으로 성전재건 공사가 무려 16년 동안이나 중단됐죠.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자, 이제 내가 원하는 걸 말해 주마.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오거라. 베어온 목재로 성전을 다시 짓거라. 오직 날 위해 그렇게 해 줄 수 있겠니? 날 공경하는 마음으로…?” – 학 1:8
하나님은 건물이 필요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천지를 지으신, 영이신 하나님이니까요(행 7:48–50).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성전건축을 명하신 이유는, ‘너희는 지금 무엇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고 있니?’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건축이 다음과 같은 상징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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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두겠다는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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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공동체의 신앙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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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으로 나태해진 백성들을 깨우는 경종
다시 말해서, 성전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공동체의 믿음 상태를 비쳐주는 거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식보다 마음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때로는 ‘외적 형식을 통해 내면의 자세를 다시 정렬하라’고 요구하시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전건축은 ‘너희 삶의 우선순위는 뭐니?’라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영적 도전장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함께 [학개] 번역본을 읽으면서, 무너졌던 성전을 다시 세워 보는 게 어떨까요? 돌과 나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건축자재인…. 상한 마음과 회개의 눈물로 말이죠.
잘 아시다시피, [스가랴]는 [학개]와 더불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을 재건하라’고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에 [스가랴]를 번역하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전이 ‘물리적인 건물’만이 아닌, ‘우리 자신’을 의미함을 다시 한번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 고전 6:19
너무도 유명한 이 말씀! ... 사실 저도 오래도록 이 구절을 ‘내 몸이 성전이다’라는 ‘개인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였었는데요... 하지만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니, 훨씬 더 놀라운 의미가 숨겨져 있더군요. 바로 이 구절에서 ‘너희(ὑμῶν)’는 복수형이지만, ‘몸(τὸ σῶμα)’과 ‘성전(ναὸς)’은 단수형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복수)가 함께 이룬 공동체가 하나의 몸(단수), 하나의 성전(단수)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스가랴]에서도 같은 맥락의, 성전에 대한 말씀이 있더군요.
“그들이 바로 기초가 되고, 기둥이 되고, 도구가 되고, 건축자재가 될 거요. 주님이 그들을 ‘주님의 성전재건 프로젝트’의 리더로 쓰실 거요. 한 팀이 된 그들, 어깨에 힘 빡~주고, 고개를 번쩍 들고, 늪이든, 진흙탕이든, 어디든 힘차고 당당하게 걸어 나갈 거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세상이 뭐라 해도 겁먹지 않고, 용기 있고 위풍당당하게 헤쳐 나갈 거요.” - 슥 10:4~5
물론 이러한 개념은 신약에서도 일관되게 언급됩니다. 우선 에베소서 말씀을 보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지금 집을 한 채 세우고 계세요. 우리 모두를 사용하셔서ㅡ우리의 과거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고ㅡ우리와 함께 집 한 채를 세우고 계신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이 집의 기초공사에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사용하셨지요. 그런데 지금은 여러분을 사용하고 계세요. 그리스도를 기초석(cornerstone)으로 해서, 여러분들 하나하나가 벽돌 한 장 한 장으로, 돌 하나하나로 딱 맞는 자리에 들어가, 서로 연결되어 집이 세워지도록 여러분을 건축자재로 사용하고 계세요. 우린 매일 매일 건축물ㅡ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성전ㅡ이 점점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보고 있어요. 우리 모두가 다 건축자재가 되어, 각자 딱 맞는 자리에 들어가, 하나님의 집인 그 건축물을 세워 나가고 있는 거예요.” – 엡 2:20-22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러한 ‘공동체적 성전’ 개념이 그 조화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말씀은… 고린도전서 12장이라고 할 수 있겠죠(아무리 살펴봐도, 이 주옥 같은 말씀에서 뭐 한 구절 뺄 게 없어, 좀 길게 인용해 봤습니다).
“우리 몸은 팔다리, 기관, 세포 등등 많은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지요. 이처럼 우리 몸에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지체가 있지만, 여전히 ‘몸은 하나’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방식도 똑같습니다. 한 분이신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부분적이고 개별적인 삶’과는 진작에 멀어진 겁니다. 각자 독립적으로 자기 삶을 영위하던 우리가, 이제는 ‘주님께서 모든 일에 최종 결정권을 가지시는, 크고 온전한 삶의 세계’로 들어온 것이지요(우리가 세례 받을 때, 말과 행동으로 이 사실을 이미 선언했지요). 우리 모두는 그분의 부활하신 몸의 일부분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마시는 하나의 샘(성령님)에 의해 매일 생기를 얻고 생명을 유지하는 겁니다. 우리가 과거에 자기소개 할 때 썼던 그 오래된 이름표-유대인, 그리스인, 노예, 자유인 등등-는 이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좁은 소견에서 벗어나, 이젠 좀더 크고 넓게 생각하자구요!
이러한 것들이 여러분을 하찮은 사람이 아닌, 얼마나 중요한 사람으로 만드는지 생각해 보세요. 우리 몸이라는 게 어느 한 기관을 뻥튀기 한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부분들이 연합되어 같이 작동되지 않습니까? 발이 ‘난 반지로 치장한 손처럼 세련되지 못해. 아무래도 이 몸에 내가 낄 곳은 없는 것 같아’라고 하는 게 말이 되나요? 귀가 ‘난 맑은 눈동자로 뭔가를 표현하는 눈처럼 아름답지가 않아. 그러니 난 얼굴에 붙어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아’라고 한다고 해서 귀를 얼굴에서 떼어 버리겠냐구요? 만약에 온 몸에 눈밖에 없다면, 어떻게 소리를 들을 수 있나요? 온 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냐구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의 각 기관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놓으셨어요.
그런데도 자기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르겠네요. 여러분이 얼마나 중요한진 모르겠지만, 그저 몸의 일부일 뿐이라구요! 거대한 귀나 거대한 손은 몸이 될 수 없어요. 그냥 괴물일 뿐이지요. 우리 몸에는 여러 기관이 있고, 각 기관들은 딱 적당한 크기로, 딱 적당한 곳에 달려 있어요. 어떤 기관도 혼자서는 의미가 없어요. 눈이 손에게 ‘꺼져 버려. 너 따윈 필요 없어!’라고 한다거나, 머리가 발에게 ‘넌 해고야, 오늘부터 네 업무는 없어!’라고 말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사실, 실생활에서는 의외로 ‘더 낮은’ 기관이 더 기초가 되고, 더 필요한 법이지요. 예를 들어, 눈이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위가 없이는 못 살 듯이, 우리 몸의 각 기관도 ‘눈에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 치장을 했느냐 아니냐, 높냐 낮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각 지체들을 서로 비교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를 존중해 주고 인정해 줘야 해요. 굳이 편을 들자면, 몸에서는 강한 지체보다는 연약한 지체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지요. 윤기 나는 머리카락과 튼튼한 위장 중에 굳이 하나를 택하라면 위장을 택해야 하지 않겠어요?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어떻게 설계하셨나 보고 있노라면, 이것이야 말로 교회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생리를 이해하는 모델이 된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관심을 받건 못 받건, 보이건 보이지 않건 간에, 모든 지체들이 저마다 다른 지체들을 의존하고 있지요. 만약 우리 몸의 한 부분이 다치면, 몸 전체가 같이 아프게 되고, 그 아픈 부분이 나으면 몸 전체가 회복되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한 부분이 성장하면, 다른 부분도 그 건강함을 함께 누리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정체성입니다! 이 사실을 절대 잊지 마세요. 여러분이 그 몸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할 때에만, ‘지체의식’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답니다.” – 고전 12:12-27
***
개인적인 얘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제가 요즘 어깨가 아파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몸의 다른 지체들이 ‘이 골칫거리 아픈 어깨를 내쳐 버리자’고 모의하는 게 아니라, 저의 아픈 어깨를 돕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느 날 깊이 다가왔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누구나 가까이 하고픈 매력적인 사람들도 있지만, 그 정반대인 사람들도 있지요. 만약 우리가 그렇게 소외되고 연약한(겉보기엔 승질 드러운^^) ‘아웃사이더’들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며, 각자의 자리에서 진심을 다해 돕는다면, 세상은 머잖아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정말 살 맛 나는 곳이 되지 않을까요?
우리 함께 메시지 성경 [스가랴] 번역본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오랜 꿈인 ‘참된 성전’을 재건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서의 [말라기]를 통해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후, 무려 400년간이나 침묵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외람되지만, 저의 저서 [성경의 맥과 핵]을 인용해, 이에 대해 나눠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 내가 말했지. “난 너희를 정말 사랑한단다.”
하지만 그 말에 너흰 이렇게 대답하더구나.
(백성들) 헐~ 주님이 언제 우릴 사랑하셨다고 그러세요? – 말 1:2a
이 장면은 이혼 직전의 부부를 연상시킵니다. 끊임없이 외도를 일삼는 아내, 하지만 그 아내를 줄기차게 사랑하는 남편! 그래서 남편은 외도한 아내를 다시 데려오고 용서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아내가 마주 앉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랑을 고백하죠.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오?”
그런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아내의 입에서 ‘아니, 당신이 날 언제 사랑했다고 그래요? 증거를 대 봐요. 못 믿겠어요’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겠어요?
너무나 기가 막힌 남편은… 그날부터 입을 닫고 말았습니다.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구나. 도무지 말로는 안 되겠구나’라면서 침묵하고 말았죠.
이것이 바로 구약시대 전체의 슬픈 결말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끊임없이 영적 간음을 저지른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다시 한번 사랑을 고백하시지만… 여전히 무심한 이스라엘의 태도에 400년간이나 침묵하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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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1~2장에서 하나님은 타락한 제사장들을 꾸짖으십니다. 형식적 제사, 성의 없는 제물, 습관적 예배….
잘 아시다시피 제사장은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중책을 맡은 제사장들이 ‘출근 도장만 찍고는, 어슬렁거리다가 월급만 따박따박 타 가는’ 업무태만을 일삼자, 하나님께서는 아예 본사에서 새로운 제사장을 파견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죠.
“잘 듣거라! 내가 내 메신저를 먼저 보낼 거란다. 그가 내 길을 준비할 거란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너희가 그토록 찾던 지도자-그래, 너희가 그토록 기다리던 언약의 메신저-가 성전에 등장할 거란다. 잘 보거라, 그가 오고 있구나!” – 말 3:1a
과연, 이 ‘본사 특파’ 제사장은 확실히 달랐습니다! 직접 일하시고, 직접 중보하시며, 직접 희생제물이 되심으로써, ‘한번에, 영원히, 온전한’ 제사를 드리셨죠(히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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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선지서들처럼 [말라기] 역시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로 시작되지만…, 이번에도 예외 없이 결말은… ‘밝은 소망의 메시지’로 마무리됩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의의 태양이 떠올라, 그 날개에서 치유의 광선이 펼쳐질 거란다. 너희가 원기왕성하게 될 거란다. 폴짝폴짝 뛰는 망아지처럼 생기발랄하게 될 거란다.’ – 말 4:2
그리고 약속대로 ‘의의 태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어둠을 몰아내시고, 병든 우리를 치유해 주심으로써 새로운 아침을 열어 주셨죠.
여러분도 [말라기] 번역본을 읽으시면서, 주님의 의의 햇살을 받아 원기왕성하고 생기발랄한, 복된 삶을 살아가시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