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영적전쟁의 손자병법, 여호수아의 난중일기’인 여호수아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과 광야훈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무장시키신 후, 드디어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이 땅은 군사력으로 정복한 게 아니었죠. 오로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이는’ 이 세상의 수퍼파워들-사탄의 하수인들-을 거뜬히 물리쳤으니까요. 33전 33승(아이성은 9회말 역전승)으로요!
여호수아서는 제가 개인적으로 번역이 유난히 힘든 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가장 어려워하는 지리와 지명이 너~무 많이(약 400개) 나와서 말이죠. 마치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드는 과정을 다큐로 엮은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처음엔 ‘지금 다 고증하기도 어려운 그 수많은 지명들을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성경에 기록하셨을까?’라며 골치 아프게만 생각하다가, 막상 번역을 완성하고 다시 읽어보니 그렇게 은혜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곧 ‘하나님의 꿈’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어느 곳 하나 허투루 지나치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American Dream이란 말이 있죠.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는 나라, 미국을 의미하는 말이지요(지금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그런데 가나안 땅은 꿈의 나라, 미국에 댈 바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며 완벽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우유와 꿀이 넘쳐흐르는, 축복의 땅이었으니까요.
그 수많은 지명들을 하나하나 언급하시면서 가나안 땅 곳곳을 소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저는 에덴동산의 추억을 떠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손을 잡고 그들을 위해 준비해 놓으셨던 에덴동산을 구경시켜 주시며, 그들과 함께 행복하게 사실 생각에 얼마나 마음이 설레셨을까요?
마찬가지로, 가나안 땅 구석구석의 세세한 지명들을 다 언급하시면서 하나님은 꿈에 부풀어, 마음이 설레십니다. ‘이곳이 바로 내가 너희와 사랑을 나누며 살 땅이야!’라면서 우리의 손을 붙잡고 하나하나 안내해 주시죠.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마지막(24장)엔 역사교육을 빼놓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분명 ‘네 근본을 잊지 마!’라는 의미였을 겁니다. 죄와 사망의 노예로 살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해방시켜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우리의 비천한 출신성분을 잊지 말라고, 그리고 다시는 이전의 노예 신분(세상의 종)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우리를 다시 종으로 부리려는 이 세상의 세력들을 하나도 살려두지 말라고, 그리고 이젠 당당히 하나님의 자녀로 사랑받으며 살라고 다시 한번 신신당부하시죠.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당신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는 걸로 여호수아서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십니다. 속고 또 속으시면서도, 우리를 향한 신뢰와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이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 같군요.
여러분도 여호수아서를 읽으시고 영적전쟁에 승리하셔서,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맘껏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사사기
사사기는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영웅들의 모험담과도 같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죠. (그래서 주일학교에서 가장 많이 설교하는 성경이 바로 사사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저는 이번에 사사기를 번역하면서 사사기에 나오는 12명의 사사 가운데 특별히 두 명의 사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번째는 기드온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실 때, 기드온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천사가 말했어요. “오, 용맹스러운 전사여!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신단다!”
그러자 기드온이 말했어요. “저요? 헐~ 지금 절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요?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도대체 이 모든 일들이 왜 우리에게 일어나는 거죠? 우리 부모님들이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들려주셨던 그 기적과 표적들은 다 어디 출장갔나 보죠? 우리 조상들이 얘기하던 ‘우리를 애굽에서 구출해 주신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로 놀러 가셨냐구요? 제가 불편한 진실을 말해 볼까요? 하나님은 우리한테 일말의 관심도 없으세요! 그러니까 우리를 이렇게 미디안의 손아귀에 넘겨주신 거 아니겠어요?” -삿 6:12~13
많은 사람들이 종종 이렇게 말하죠.
“하나님이 계시다면 세상이 왜 이래?”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정의나 공의는 찾아볼 수 없고, 죄악과 불공평이 난무하는 이 세상을 바라보며 우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지만 사사기를 읽어보면 이러한 악한 세상이 결코 하나님 책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사기에 반복되어 나오는 말이 있죠.
“당시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 사람들이 그냥 자기 맘 내키는 대로 막 살았답니다.”
물론 사사시대는 왕정시대 이전이었으니까,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던 게 사실이지만, 제 생각에 여기에서 말하는 왕은, 바로 ‘하나님’이 아니신가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스스로 자기 인생의 왕이 되려 할 때, 우리의 삶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무정부상태로 극도의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또 두번째로 제 관심을 끈 사사는 삼손이었습니다. 제가 삼손의 ‘비극적인 말로’ 부분을 번역할 때에는 눈물이 앞을 가려… 흑흑…. 삼손은 나머지 11명의 사사와 달리, 잉태된 것부터가 기적이고 은혜였을 뿐만 아니라, 태중에서부터 이미 나실인으로 지목받은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즉, 영적인 안목으로 보자면, 금수저 중에도 24K 순금수저였단 말이죠. 하지만 그의 삶을 보면, 나실인은커녕, 일반인도 감히 꿈꾸지 못할 어이없는 일들의 연속입니다.
삼손이 태어나기 전부터 삼손의 부모에게 천사가 찾아가, 나실인으로서 지켜야 할 금기사항들을 신신당부한 멘트가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되어 기록된 것만 봐도, 삼손이 어릴 때부터 얼마나 철저한 나실인 교육을 받았을지 상상이 갑니다. 해서는 안 될 금지조항들이 너무 많다 보니, 삼손은 그만큼 절제된 삶을 살았을 테고, 사춘기(?)가 되면서 그 억압된 것들이 터져 나와, 그의 삶이 더 반항적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 민족, 우리 동네에도 참한 규수들이 쌔고 쌨는데, 왜 하필 할례도 받지 않은 블레셋 족속 중에서 아내를 삼겠다는 거냐?”라고 삼손의 부모가 얘기할 만큼, 삼손의 여성편력 역시 반항아 다웠지요. 굳이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 여인들에게만 꽂혔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뜻밖인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삼손에게 즉결처분을 내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삼손의 그런 부족한 모습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고, 다 이해해 주시는 좋으신 아버지십니다. 설사 우리가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형편없는 삶, 망가진 삶을 산다 해도 말이죠.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오히려 사용해 주십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냐고요?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 갔냐고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막 사는 우리의 죗값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 고스란히 다 떠넘기시고 우리에겐 ‘됐어. 이제 넌 괜찮아!’라고 말씀해 주시죠. 그게 바로 하나님 특유의 사랑법이신 걸 어떡하겠어요?
여러분도 사사기를 통해 이런 용서의 하나님께, 형편없이 망가진, 부끄럽기 그지없는 삶을 드리시고, 그 사랑의 품에 와락 안기실 수 있길 기도합니다!
룻기
성경에 나오는 ‘세 명의 신데렐라’를 아시나요? 비천한 죄인 신분인 우리가 고결한 하늘나라 왕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을 상징하는 신데렐라 말입니다. 그 세 사람은 바로 ‘룻기의 룻,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 호세아서의 고멜’이지요!
전 이번에 룻기를 번역하면서 룻기의 ‘3대 주인공들’의 특징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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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연애전문 컨설턴트): 며느리 룻과 일등 신랑감 보아스를 엮어 주기 위해 철저한 사전조사, 정보수집, 그리고 연애전략 수립으로 룻에게 일대일 맞춤형 컨설팅을 해 주는 마담뚜.
: 자신의 지혜와 경험과 인맥을 총동원해 불신자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전도자!”
2. 룻(순수하지만 대담한 신부): 이방인이었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시어머니 나오미의 조언
을 따라, 보아스의 잠자리에 은밀히 침투하는 대담함을 보여준 이방 여인.
: 죄인이라는 비천한 신분이었으나,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된 우리들!”
3. 보아스(작업의 달인): 룻을 얻기 위해 12단계의 작업을 차근차근, 신중히 실행해 나가는
완벽남
: 죄인인 우리를 신부로 맞기 위해 친히 대속자(redeemer, 고엘)가 되셔서 목숨 바쳐
우릴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행여 우리가 뒷걸음칠세라, 우릴 신중히 배려해가면서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런데 위의 세 인물 중에 특히 ‘여주’ 룻이 제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녀의 ‘담대함’ 때문이었습니다. ‘이방인’이라는 부적격자 신분으로, 돌싱녀인 그녀가 보아스에게 먼저 청혼을 하다니! 그것도 여인의 몸으로 한밤중에 남정네의 잠자리에 숨어 들어가는 담대함으로! (21세기 현대 여성들에게조차 넘사벽인 대담녀, 룻!^^)
룻의 담대함은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 자신의 못난 모습을 부끄러워하며 망설일 필요가 없음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에서, 썸을 타면서 눈치를 보거나, 소모적인 심리전(밀당^^)을 벌이는 걸 원치 않으신다는 거죠. 그분은 담대한 신부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모든 자격지심과 열등감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분께서 십자가 보혈로 이미 우릴 순결한 신부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이겠죠.
“그러니 이제 예수님께 담대히 걸어 나가, 그분이 우릴 위해 준비하신 선물을 받아 누리자구요! 바로 자비와 은혜라는 선물을요!” – (히 4:16, 메시지 성경, 허계영 번역본)
<보너스!!!>
보아스가 밟아 나간 ‘작업의 정석’ 12 단계를 공개합니다! (본문에도 표시를 해 놓았지만^^)
1단계 뒷조사 - 2단계 친절과 호의 - 3단계 폭풍 칭찬 - 4단계 식사 초대 - 5단계 특별대우 - 6단계 마니또 - 7단계 프로포즈 - 8단계 비밀 간직 - 9단계 선물공세 - 10단계 가족 공략 - 11단계 법적절차 - 12단계 골인~! 결혼!!!
사무엘상
우리는 흔히 소설을 읽을 때, 그 속에 등장하는 정의롭고 착한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무엘상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서로 대조각을 이루며 묘사됩니다. 브닌나와 한나, 엘리와 사무엘, 사울과 다윗 등으로 말이죠. 이 대조는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 남의 편과 우리 편’의 분위기를 자아내죠. 저 역시 그동안 브닌나, 엘리, 사울보다는 한나, 사무엘, 다윗과 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사무엘상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온갖 우여곡절 끝에 “착한 사람, 즉 우리 편”이 끝내 승리한다’는 통쾌한 결론에 기쁨을 얻곤 했었지요.
그런데 웬일인지 이번에 사무엘상을 번역하면서는 ‘나쁜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들을 이해해 보고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아이를 낳지 못한 한나가 안 됐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녀를 많이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브닌나의 아픔은 더 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불타오르는 질투심에 한나를 더 괴롭혔을 수도 있지요. (저라면 더 했을 듯…^^)
그런가 하면 속썩이는 아들들을 둔 엘리 제사장의 마음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저희 아들도 사춘기때 밤새 게임하다가 늦잠 자서 주일날 교회에 못 간 적이 두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때 전 엘리 제사장의 이야기가 남 얘기 같지 않았더랬습니다. 부모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자식이니까요.
그런가 하면 갑자기 등장해 일약 스타가 된 다윗이 온 국민의 인기를 독차지하면서 급부상하는 동안, 자기는 점차 꼭두각시 왕으로 전락해가는 느낌이 든 사울의 심정은 또 어땠을까요? 당연히 불안, 질투, 시기, 우울 등의 증세가 생기지 않았을까요?
전 사무엘상에 등장하는 이 비운의 세 인물들이 정말 이해가 되면서, 그들이 참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 입장이라면 그들보다 훨씬 더 ‘모냥 빠지는’ 추한 모습들을 보였을 것 같더라구요. 그들이라고 어디 그러고 싶었겠습니까?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전개되는 걸 어떡하겠어요? 어느 날부턴가 자기도 모르게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걸요. 그런데 더 슬픈 건 이들이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힘든 역경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역경마저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다’고 간증할 수 있다면 그는 최후의 승리자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무엘상의 ‘나쁜 사람들’은 그 기회조차 얻질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모태신앙으로 자라난 저는 그동안 ‘하나님이 날 버리실 거’란 생각은 거의 해 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극심한 고난의 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날 버리신 건 아닐까?’란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깔려 있던 ‘이건 일시적인 고난일 뿐이야. 그리고 내게는 영원한 하늘나라가 보장되어 있어’라는 믿음이 흔들린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와 사울은 ‘정말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었지요. 그들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그 상황은 정말 말할 수 없이 절망스럽고, 깜깜하고, 비참한…,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런 느낌이었을 것 같더라구요. 그동안 저는 지옥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유황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안 계신 곳, 하나님께 버림받은 곳이야 말로 정말 끔찍한 지옥이란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 깊은 흑암의 고통을 묵상하면서(이때 분명 성령님께서 역사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극심한 절망과 어두움과 슬픔의 무저갱에 잠깐, 아주 잠깐 살짝 발을 담갔다 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그동안 구원받은 기쁨과 감격에 감사하며 살았지만, 그 구원의 크기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지 못한, 버림받음의 상태’를 아주 잠깐이나마 체험하고 나니, 그게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고통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마음이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바닥에 엎드려 울며불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하나님이 안 계신 이곳은 너무 무섭고 어둡고 끔찍해요. 전 하나님 아니면 안 돼요. 절 살려 주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절 제발 버리지 말아 주세요! 예수님마저 절 버리시면 제겐 아무 소망이 없어요. 완전 절망이에요!’라고요.
그런데 그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시는 장면이 떠오르더군요. 저는 그동안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 대부분이 육신의 고통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영혼이 버림받은 아픔은 육신의 고통에 댈 바가 아닐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 순간, 예수님이 느끼셨던 아픔의 수백억분의 일(?) 정도만 느낀 것만으로도 너무너무너무 아프고 슬프고 고통스러웠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수백억 인류의 버림받음을 한 몸에 다 짊어지심으로써, 제가 짧게나마 체험한 그 버림받음의 고통을 수백억 배로 느끼셨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크셨을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전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모태신앙이라는 저의 신앙적 배경 덕분에, 저는 버림받음을 알기도 전에 구원을 받았고, 흑암을 알기도 전에 광명을 찾았으며, 포로됨을 알기 전에도 자유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구원과 광명과 자유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어떤 고통을 겪어야 했을지, 이번에 아주 조금이나마 맛보기를 하고 나니, 독생자 예수님을 우릴 위해 과감히 포기하신 하나님의 사랑, 우릴 위해 그 극심한 고통을 묵묵히 대신하신 예수님의 은혜, 그리고 이를 깨닫게 해 주신 성령님의 자상한 도우심이 얼마나 큰 거였는지…. 그건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상상초월, 메가톤급 사랑이더군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구원의 은혜를 ‘일만 달란트(현 시가로 20조원, 당시 노동자가 16만 년 이상 안 먹고, 안 쓰고 죽도록 일만 해서 모아야 하는 금액)의 빚’으로 비유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구원의 크기가 얼마나 큰 건지, 왜 우리의 행위나 노력으로는 도저히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건지’를 강조하셨던 것이죠!
여러분도 사무엘상을 통해 이러한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꼭 체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P. S. 제가 너무 엘리와 사울 편을 든 것 같아, 그래서 하나님이 아무 이유없이 사람 차별하셨다는 인상을 받으실 수 있을 것 같아,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사무엘상을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엘리와 사울은 하나님께서 경고하셨을 때, 진정으로 참회와 회개를 하지 않았던 걸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니면 안 된다고, 예수님 없인 못 산다고, 죽기살기로 매달리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하나님으로서도 방법이 없으셨던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우리가 도리어 그 자유의지를 이용해 하나님을 떠나 살겠다고 한다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시지만, 하나님으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으신 겁니다. 그게 바로 엘리와 사울이 끝내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반면 한나와 다윗은 똑 같은 죄인이었지만, ‘하나님 아니면 안 된다고, 예수님만이 내 유일한 희망이라고’ 죽기살기로 매달렸기에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뿐이겠지요.
사무엘하
제 생각에 성경에서 사무엘하만큼 드라마틱한 책도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의 약속으로 최고 정점을 찍었던 다윗의 인생이, 밧세바 사건과 더불어 걷잡을 수 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두 가지 극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럼 먼저 다윗 인생의 클라이맥스, [다윗 언약]의 의미부터 살펴볼까요?
구속사적 관점으로 볼 때, 사무엘하는 구약성경 전체의 분수령과도 같은 중요한 책이라고 하죠.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 때문입니다(삼하 7:8~16). 이 [다윗 언약]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동안의 [아담 언약-노아 언약-아브라함 언약-시내산 언약]과 맥을 같이합니다.
1)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축복을 주시겠다고 하는 ‘은혜의 언약’이라는 점
2)새로운 언약으로 이전 언약이 폐기되는 게 아니라, 더 강화되고 구체화되는 ‘업그레이드 언약’이라는 점
3)이 언약들 모두 궁극적으로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언약’이라는 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 집안과 네 왕국을 내가 영원히 안전하게 지켜 줄게. 네 왕좌 또한 언제나 흔들리지 않게 내가 견고히 지켜 줄게(삼하 7:16)’라고 다윗과 언약하심으로써,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놀라운 축복의 말씀에, 다윗은 벅찬 감격의 기도로 화답하죠(삼하 7:18~29).
그런데 이런 다윗이…, 이런 다윗이…, 얼마 후 간음과 살인이라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요?
다윗은 10년간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광야를 유리할 때, 오로지 하나님께만 매달렸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니면 단 하루도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스라엘 왕으로 군림하면서 안락한 삶에 빠져들자, 자기도 모르게 점차 하나님을 잊었던 것 같습니다.
‘사탄의 최대 전략은 우리를 더러운 죄에 빠뜨리는 게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가지인 우리가 나무이신 예수님에게서 분리되는 순간, 우리는 자동적으로 죄에 빠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는 말씀이 정말 진리인 것 같습니다. 고난이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해 주는 방향키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조지 맥도널드의 비유를 인용하는 것으로 저의 사무엘하 번역후기를 마무리 지을까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살아 있는 집이라고 상상해 보세요. 지금 하나님이 오셔서 그 집을 다시 지으려 하십니다. 처음에는 그분이 하시는 일이 이해가 잘 될 것입니다. 그분은 하수구를 고치시고 지붕 새는 걸 막는 일들을 하십니다. 이런 것들은 필요한 일이므로 놀랄 필요가 없죠. 그런데 얼마 안 가 그분이 집을 마구 때려 부수기 시작하시는데, 이건 지독하게 아플 뿐 아니라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도대체 그분은 무슨 짓을 하고 계신 걸까요? 그분은 여러분의 생각과 완전 딴판인 집을 짓고 계십니다. 여기에는 한쪽 벽을 새로 세우시고, 저기에는 바닥을 더 깔고 탑을 새로 올리시며 마당을 만드십니다. 여러분은 보기 좋은 작은 오두막집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궁전을 짓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친히 그 궁전에서 사실 작정이시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열왕기상을 번역하는 동안, 유난히 제 가슴에 다가온 구절이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사랑했어요.” – 왕상 3:3
정말 단촐한 한 마디지만 너무 많은 게 내포되어 있는, 가슴 찡한 표현이었죠.
또 솔로몬이 왕위에 즉위한 후 일천번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했던 말!
“제가 바라는 것은 이것입니다. 제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주세요.” – 왕상 3:9
정말 순수하고 아름다운 기도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ㅎㅎ) 여로보암의 쿠데타로 이스라엘이 남북왕국으로 분열된 후, 북왕국은 줄곧 ‘우상숭배’라는 죄악의 길을 걷잖아요? 그러면서 성경은 그 이후 모든 북왕국 왕들에 대해 마치 무슨 후렴구라도 되는 양 이런 평가를 덧붙이지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자기만 죄짓는 데 그치지 않고 이스라엘을 죄악의 구덩이로 끌어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던 것처럼, OOO역시 머리도 비고, 마음도 빈, 헛된 삶을 살았던 거예요!”
한마디로,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의 범죄와 패망의 원흉이었음을 두고두고 강조하는 걸 볼 수 있죠. (지금도 여로보암은 귀가 많이 가려울 듯^^)
그래서 저 역시 그동안 열왕기를 읽으면서 북왕국 패망의 제1 원인제공자는 여로보암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열왕기상을 번역하다 보니, 남북왕국 패망의 근본 책임은 여로보암이 아닌 솔로몬에게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셨어요. ‘네가 내 명령을 지키지 않고 믿음의 길을 따르는 데는 전혀 관심도 없이, 정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난 이 왕국을 네게서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찢어줄 테다. 하지만 네 아버지 다윗을 존중하는 의미로, 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대신 네 아들이 네 죄값을 치르게 될 게야. 내가 네 아들의 손에서 이 왕국을 빼앗을 테다. 하지만 다 빼앗지는 않고, 내 종 다윗과 내가 선택한 성읍, 예루살렘을 존중하는 의미로, 네 아들에게 한 지파는 남겨주마.’” – 왕상 11:11~13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했던 솔로몬이, 또 그토록 하나님께 큰 축복을 받았던 솔로몬이 도대체 어쩌다 이스라엘 민족의 패망의 원흉이 되었을까요?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다가 문득 ‘음수사원飮水思源’라는 사자성어가 생각났습니다.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해야 한다’라는 뜻이지요.
우리가 축복을 받으면 처음엔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축복에 도취되어,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마음도 점차 교만해지죠. 마치 그 축복이 원래 자기 것이었던 것처럼 말예요. 그리고 그때 그 축복이 우상이 되어, 축복이 아닌 저주로 둔갑해 버린다는 사실도 잊고 말죠.
성경에는 솔로몬 말고도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던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욥, 다윗 등등…. 그런데 이들이 솔로몬과 달랐던 게 있었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끝까지 잊지 않고 기억했다는 거였죠. 그들은 축복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던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유일한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도 열왕기상을 읽으시면서 깊이 묵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열왕기하
잘 아시는 것처럼 열왕기하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후반부 역사에 해당되는 왕들의 행적을 기술하고 있는 책입니다. 중간중간에 선한 왕들도 빤짝 등장하긴 하지만, 대부분의 왕들은 악행을 일삼았었죠. 그리고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이 이야기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으로 결말이 납니다. 이러한 망국의 원인을 설명하는 저자의 논조에는 말할 수없이 애절한 안타까움이 배어 있네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된 이유는 그들의 죄 때문이었어요.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하나님, 자기들의 하나님을 대항해 죄를 지었거든요.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들을 애굽과 바로 왕의 잔혹한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바로 그 하나님께 죄를 짓다니…! 백성들 역시 왕들 못지않게 다른 신들을 섬기면서, 일찍이 하나님께서 내쫓으셨던 이방국가들의 생활방식을 탐닉하는 등,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다 한 거예요. 하나님을 거역하는 교활한 짓들을 거침없이, 닥치는 대로 다 했지요. 심지어 어디 빈 땅만 있으면 얼싸 잘됐다면서, 음란한 섹스교사당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대놓고 지어댔다니깐요? 또 음란한 섹스교의 상징물도 골목골목에 세워 놓았어요. 전국 어딜 가나 이방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연기가 치솟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어요. 일찍이 이방국가들을 포로로 끌려가게 만들었던 바로 그 문제의 연기가요! 그들의 끝도 없는 악행리스트는 하나님을 질리게 했어요. 하나님께서 너무 지치셔서 ‘제발 그만해, 제발!’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나무를 깎거나 흙을 빚어 만든 우상을 주구장창 섬겼기에 하나님도 이젠 두손두발 다 드신 거예요.” – 왕하 17:7-12
나라가 망하면서 예루살렘 성읍도 훼파되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던 성전마저 처절하리 만치 파괴되고 말았다는 것이었죠. 어쩌면 당시 하나님을 믿지 않던 이방민족들이, 아니,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마저 이런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이 이렇게 철저히 파괴된 걸 보면, 역시 하나님보다 가나안 신들이 더 세긴 셌던 모양이야. 그들과의 싸움에서 하나님이 밀리셨잖아?’라고 말이죠. 과연 그럴까요?
여기에서 우리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크게 손해보실 거란 생각이죠. 마치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위상이 순식간에 떨어진다는 듯이, 그래서 우리의 경배로 하나님의 지위를 유지시켜 드리는 것처럼, 쉽게 말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예배를 드려주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거죠.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없어도 전혀 아쉬울 게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혼자서도, 그 한분만으로도 완전하시니까요. 게다가 수많은 천군천사가 늘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데, 우리가 거기에 좀 더 보태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위상이 더 올라가는 건 절대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우리의 예배를 원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죠. (고놈의 사랑 때문에!) 재벌 아버지가 자식한테 뭐 좀 얻어먹으려고 자녀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녀를 너무 사랑해서 자녀의 사랑과 효도를 바라는 거랑 마찬가지인 거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사랑과 은혜, 그리고 삶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힘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단 말이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내 인생의 왕 되심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우리 삶의 질서를 회복할 때, 우린 비로소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의탁함으로써 평안하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거죠. 그러니 엄밀히 따지고 보면 예배는 사실 하나님을 위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쏟아부어 주시려고 만들어 놓으신 장치인 거라고 할 수 있지요.
최근 2년 넘게 코로나로 인해서 예배당이 텅텅 비고, 제대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 하나님 손해 아냐?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코로나를 없애 주시지 않는 거야? 하나님이 코로나 하나 해결할 능력이 없으실 정도로 무력하신 분이란 말야?’라고 말이죠.
하지만 전 이것이 하나님의 경고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대체품을 더 의지했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마저 무너뜨리셨던 것처럼 그동안 우리가 형식적인 예배, 습관적인 예배, 마지못해 드리는 예배, 마치 하나님한테 적선이나 해주듯 교만한 태도로 예배를 드렸던 것에 대해서, 제대로 예배드리지 못할 때 우리가 얼마나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처참히 패배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 열왕기하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역대상
역대상은 전체 29장으로 되어 있죠. 그런데 그 중 첫 9장이 족보에 관한 기록입니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끝없는 이름들을 읽다 보면, 그 지루함에 어느새 눈이 감기게 되죠. 그런데 10장에 접어들면서 드디어 족보가 끝나나 싶더니, 중간중간에 또 다시 끝없는 명단들이 시도때도 없이 출현합니다.
저 역시 그동안 창세기, 에스라, 느헤미야, 그리고 마태복음 등에 나오는 족보와 명단들을 읽을 땐 자연스레 불면증이 치유되는 기적을 맛보았었는데요(ㅎㅎ), 이번에 역대상을 번역하면서 이 족보가, (전화번호부처럼^^) 단순한 이름들의 나열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기나긴 족보는 결국 한 인물의 등장을 알리기 위한 배경에 불과하단 생각이 들더군요.
아담부터 이어진 방대한 인류 역사! 그러다 드디어 한 인물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면서, 주인공이 무대로 등장합니다. 그 인물은 바로 ‘다윗’이지요! 그 이후에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명단들’ 역시 다윗을 주인공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출연하는 조연배우나 엑스트라들입니다. 그들은 다윗의 개국공신들(선거캠프의 킹메이커들), 다윗이 임명한 예배위원들(제사장, 찬양대, 성전경비대원 등), 다윗을 보필한 행정각부 관리들, 그리고 다윗 휘하의 군대조직 등으로 소개됩니다.
역대상의 족보나 명단 이외의 내용 역시 다윗의 즉위(사울의 죽음조차 다윗의 즉위 배경을 설명하는 사건으로 간단히 묘사되죠), 다윗의 언약궤 수송작전, 다윗의 찬양, ‘다윗의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다윗의 승전기록, 다윗의 인구조사(역대상에 기록된 다윗의 유일한 오점!), 다윗의 성전건축 준비, 다윗의 고별사 등으로 다윗을 주인공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이야기들입니다. 그 중에서 클라이맥스는 단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가 내 집과 내 왕국 위에 그(네 아들)를 영원히 세울 거야. 그의 통치가 내 집과 내 왕국에서 영원하고도 견고히 지속될 거야(대상 17:14)’라고 약속해 주시는 장면일 것입니다.
자, 이쯤 되면 지금껏 왜 이렇게 다윗을 내세웠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요? 그렇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최종적인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모델로 삼으셔서 특수정예 훈련을 시키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불순종한 끝에 ‘망국과 바벨론 포로생활’이라는 비극을 맛본 후, 이제 겨우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대기 기자는 ‘제사장 나라’라는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고자, 그리고 언젠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놓지 말라고 당부하고자, 그리스도의 예표였던 다윗 왕의 이야기를 이렇게 치밀하게, 이렇게 조직적으로, 이렇게 극적으로, (그리고 이렇게 장황하게^^) 이끌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성경의 맥은? 구속사! 성경의 핵은? 예수 그리스도! (참고로 이것은 ‘성경의 맥과 핵’ 저자의 글이었습니다.^^)
역대하
다윗의 죽음으로 1막(역대상)을 내린 역대기는, 솔로몬의 즉위 장면으로 2막(역대하)을 엽니다. 그리고 무려 아홉 장(1장~9장)에 걸쳐서 솔로몬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데요, 그중 성전건축에 관한 내용이 여섯 장(2장~7장)이나 차지하죠. 특히 6장은 그 전체가 ‘성전건축 완성 후 솔로몬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문’일 만큼, 역대기 기자는 이 감동적인 솔로몬의 기도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님께 죄를 지어 적들에게 흠씬 두드려 맞은 후,
주님께 돌아와 이 성전에서 뜨겁고도 간절하게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통치를 다시금 인정하면,
주님이 거하시는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 대하 6:24~25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남유다의 전쟁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전쟁 이야기들-무려 18번의 전쟁-이 기술되고 있는데요, 그중 가장 흥미진진한 두 가지를 꼽는다면, 여호사밧과 히스기야의 승전기(일명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승리하기’)일 것입니다.
(1) 여호사밧 시대에 모압+암몬+마온 연합군이 쳐들어옵니다. 그때 여호사밧은 이렇게 기도하죠.
“이스라엘은 이곳에 거하면서 주님을 영화롭게 할, 거룩한 예배의 집을 짓고 이렇게 기도했지요.
‘앞으로 최악의 사태-전쟁이든, 홍수든, 질병이든, 굶주림이든-가 벌어져, 저희가 이 성전(주님이 이곳에 친히 거하신다는 걸 저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에 와, 저희에게 닥친 고통과 고난에 대해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저희 기도를 들으시고 저희에게 승리를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 이 야만족 오랑캐들이 저흴 공격하려 하는데, 저흰 속수무책입니다. 완전 멘붕상태라구요! 그저 주님만 바라볼 뿐입니다!” – 대하 20:8~12
그런데 여호사밧이 기도를 마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적군을 교란시키셔서 자기 편끼리 공격, 자멸하게 만드신 거죠!
(2) 히스기야 시대에는 앗수르의 산헤립이 쳐들어와, 기고만장한 태도로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이에 히스기야 왕은 선지자 이사야(아모스의 아들)와 함께 기도로 대응했어요.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죠. 그러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앗수르 진영의 모든 군사들-전사들이건, 지휘관들이건 할 것없이-을 다 쓸어버리셨어요. 산헤립은 망신만 당한 채, 꼬리를 내리고 자기 나라로 철수해야 했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이에요? 산헤립이 자기 신의 사당에 들어갔을 때, 그의 아들들이 그를 살해했지 뭐예요?” – 대하 32:20~21
여호사밧과 히스기야가 솔로몬의 기도를 기억하고 기도했을 때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오래전솔로몬에게 해 주셨던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 주신 것이죠.
“주님의 백성이 주님께 돌아와 이 성전에서 뜨겁고도 간절하게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통치를 다시금 인정하면, 주님이 거하시는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에스라
에스라는 그 유명한 ‘고레스칙령’과 함께 시작하죠. (바로 전에 나오는 역대하의 결말과 똑 같은 내용!) 많은 역사학자들이 ‘세계사의 미스터리’로 생각하는 이 고레스라는 인물이(세상의 어느 왕이 애써 잡아온 포로를 그냥 돌려보내 주냐고요!) 그가 태어나기 무려 200년 전에 이사야서에 예언되어 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사 44:28~45:5)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이 고레스 왕뿐만 아니라 훗날의 다리오 왕, 그리고 아닥사스다 왕 등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던 이방 왕들이, 예루살렘 성전과 성읍 재건을 위해 포로해방뿐만 아니라 전폭적인 재정지원(전에 약탈했던 성전기물들, 금은보화, 희생제물 등)과 조세면제, 그리고 외부인들의 방해공작 금지령 선포, 유다지역에서의 인사권과 재판권 부여.. 등 포로귀환민들에게 베풀어준 특혜 리스트는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스 7:25~26).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이런 기적 같은 일들이, 성경의 다른 부분에도 여러 번 나온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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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가 자기 혼자 살자고 아내를 팔아먹을 뻔했을 때, 오히려 사태가 역전되면서 애굽 왕에게서 거액의 위로금을 받았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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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 왕 바로가 죽이려 했던 아기 모세가 극적으로 애굽 왕자로 입양돼 애굽황실로부터 전액장학금과 생활비까지 지원받아가며 초엘리트 교육을 받았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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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애굽인들이 금은보화 등을 싸 주며 400년간 체납되었던 임금을 일시에 지불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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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러 돌아가겠다고 할 때,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이 성벽재건에 필요한 최상급 목재를 무상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기병 경호대까지 파견해 줬던 일(느 2:8~9)
성경엔 이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서프라이즈 선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선물들이, ‘수혜자가 자격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로 주어졌다’는 사실이 더 놀라운 거죠.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크고 놀라운 ‘공짜 선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지요!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었던 우리에게, 아무 자격조건을 따지지 않으시고 공짜로 주신 그 엄청난 선물, 예수 그리스도!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게 우리 편에서는 공짜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독생자를 희생시키실 만큼 엄청난 희생이었다는 사실이지요.
여러분도 에스라 번역본을 읽으시면서 ‘하나님의 상상초월 서프라이즈 선물들’을, 그리고 그중에서도 최고의 선물인 ‘구속의 은혜’를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보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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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제가 에스라를 번역하면서 역사적 순서가 뒤죽박죽인 것 같아 너무 이해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각종 참고자료를 조사해 가며 연구한 끝에, 4:6~23은 당시의 성전재건이 아닌, 훗날 있었던 ‘예루살렘 성읍과 성벽재건’을 방해했던 또 다른 예시라는 사실, 그래서 사건의 시간적 전개는 4:5에서 4:24로 곧바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해 따로 박스처리했습니다. (기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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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우리를 너무 골치 아프게 만드는 <포로(귀환)시대 이방 왕들과 주요사건 연대기>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넣었습니다(14쪽을 보세요). 바벨론, 메대, 페르시아의 왕들-느부갓네살, 벨사살, 다리오, 고레스, 또 다른 다리오, 아하수에로, 아닥사스다-와 그 동시대를 살았던 믿음의 인물들-다니엘, 에스겔, 모르드개, 스룹바벨, 학개, 스가랴,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등-이 겪었던 사건들을 시간적 흐름에 따라 명쾌하게 정리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쓰담쓰담^^)
느헤미야
경영학에서는 리더쉽을 ‘다른 사람을 움직여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느헤미야야 말로 리더쉽이 매우 탁월했던 ‘천상 리더(natural leader)’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B.C. 537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이 내려진 후, 1차 포로귀환대(대장: 스룹바벨)가 ‘성전재건’이라는 대사명을 안고 예루살렘으로 복귀, 각종 우여곡절을 겪으며 2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서 어렵사리 성전재건 사명을 완수합니다. 그후, B.C. 458년 2차 포로귀환대(대장: 에스라)가 약 130년간이나 폐허상태로 방치돼 있던 예루살렘 성읍과 성벽을 재건하고자 하지만 여러 방해세력 때문에 이번에도 또 다시 난관에 부딪쳐 14년간 답보상태에 머물게 되죠.
그러다 마침내 B.C. 444년 3차 포로귀환대(대장: 느헤미야)가 돌아와 단 52일만에, 그 오랜 숙원사업인 ‘성벽재건’ 공정을 완수합니다! 이는 성벽이 무너진 지 장장 142년만에 이뤄낸 쾌거였습니다!
당시 페르시아 왕에게 큰 신임을 받았던 느헤미야는 자기의 지위와 인맥, 권력, 재원, 재능 등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해 낸 지극히 실용주의적인 행동파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무질서하고 연약하던 포로민 공동체를 한 마음으로 묶어 목표를 이루어 낼 수 있었죠. 느헤미야야 말로 진정한 ‘일당백’의 모델로, 혼자서 국토건설부 장관(성벽재건-전국민 대상 업무조직 편성), 경제기획부 장관(고리대금업 근절), 법무부 장관(법질서-특히 이방인과의 결혼 금지법-회복), 국방부 장관(민방위군 조직-한 손엔 연장을, 한 손엔 무기를!), 외무부 장관(사마리아인들의 방해공작을 봉쇄하고 대국 페르시아의 후원을 이끌어냄)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해 낸 엄청난 인재였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워라블’이란 말이 유행한다죠? 몇 년 전 유행하던 ‘워라밸(work-life balance)’이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이었다면, ‘워라블(work-life blending)’은 ‘일을 통해 삶의 가치를 구현하려는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합니다. 인생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삶 전체가 행복해지기 힘들다고 생각한 데서 나온 개념이라고 볼 수 있죠. 이런 면에서 느헤미야는 ‘워라블’을 통해 ‘일과 삶’을 적절하게 블렌딩한, 사명을 위해 매진하는 데서 삶의 진정한 의미와 행복을 찾았던 인물인 것 같습니다. (2,500년이나 앞선 MZ세대^^)
또한 성벽재건 및 사회개혁 등, 모든 면에서 느헤미야가 보여준 ‘솔선수범적 태도’는 오드리 헵번의 명언을 떠오르게 하는군요. “좋은 일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매우 은혜로우시지만, 당신이 먼저 당신의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신다.”
여러분도 느헤미야를 읽으시면서 크리스천 직장인들이 추구해야 할 태도와 가치에 대해 잠깐이나마 묵상해 보시길 소망합니다.
에스더
저는 예전에 에스더를 억세게 운 좋은, 또 하나의 신데렐라로만 생각했었습니다. 한낱 포로민 고아였던 에스더가 당시의 초강대국이었던 페르시아 제국의 왕비로 간택된 것이야 말로, 하루 아침에 인생역전을 맞이한, 정말 드라마틱한 이야기니까요.
그런데 이번에 에스더를 번역하면서 다시 묵상해 보니, 에스더는 신데렐라보다는 여전사(유대인 기황후^^)에 더 가까운 여인이었단 생각이 들더군요. 왜냐하면…
우선, 아하수에로 왕이 ‘신임왕비 선발대회(마치 오늘날의 수퍼모델 선발대회처럼)’를 개최하게 된 배경이 극단적인 남존여비 사상과 가부장적 사회분위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술자리에서 자기 아내의 미모를 자랑하기 위해 왕비를 불렀으나 이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왕비를 폐위시킨 후, 그 공석을 대신할 왕비를 새로 뽑는 것이었으니, 이건 결코 ‘상호존중의 결혼관계’나 ‘아름다운 로맨스’가 아닌, 처음부터 납작 엎드리고 들어가야만 하는, 불평등한 관계였던 거죠.
둘째로, 신임왕비 후보에 오른 처녀들은 1년간 특수관리를 받은 후 아하수에로 왕과의 ‘하룻밤 테스트’를 거쳐 운명이 결정되었는데, 이야 말로 전혀 인격적 존중을 받지 못한 채, 왕의 노리개 취급을 받아야 했던 대단히 모멸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죠. 또한 이 테스트에 합격하지 못하면 평생 왕궁 별채에서 외롭게 살아야 했으니…, 이 후보 명단에 오른다는 것이 결코 신나는 일만은 아니었을 듯합니다.
셋째로,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과의 결혼이 율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에, 에스더는 이 결혼으로 인해 평생 ‘율법을 어긴 죄인’이라는 오명을 쓰고 살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거죠. 물론 이 결혼을 에스더가 원해서 한 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시 ‘한 미모’ 하는 처녀들은 무조건 ‘신임왕비 선발대회’에 참여해야 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에스더는 당시 포로민으로 살아야 했던 유대인들의 처참한 역사의 희생물이었단 생각이 드는군요.
넷째로,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왕에게 나아가 유대민족의 구명을 위해 탄원해 달라’고 했을 때, 에스더가 ‘제가 전하께 부름 받지 못한 게 벌써 30일이나 된 걸요?’라고 말한 걸로 보아, 에스더와 아하수에로 왕과의 허니문이 너무 쉽게 끝나 버렸음을, 즉 어느새 권태기에 접어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페르시아의 황제 아하수에로가 30일간 독수공방했을 리는 만무하니, 아마도 에스더는 밤마다 자기보다 더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을 불러들여 잠자리를 갖는 남편을 바라보며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을 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이런 맥락에서 에스더가 결코 운발 좋은 신데렐라가 아닌, 비운의 여주인공이었단 생각이 든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동족 유대인들이 생사의 기로에 놓였을 때, 에스더는 민족을 구하겠다는 투지에 불타오르는 여전사로 돌변합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갑작스러운 ‘돌변’이 아닌, 오랜 시절 꾸준히 연마되어 온 본연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모르드개에게서 받은 신앙교육-유대민족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가 오실 것이기에, 유대민족의 정체성과 신앙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이 에스더를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남은 자(the remnant)’로 만들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에스더에게서 배울 신앙의 면모는 ‘단순함’인 것 같습니다.
우선, 다른 처녀들은 어떻게든 왕의 눈에 들려고 온갖 화장품과 액세서리로 외모를 꾸민 후 왕의 편전에 들었지만, 에스더는 환관장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채, 그냥 ‘단순한’ 자연미로 승부수를 던집니다. 이는 분명 자기의 운명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단순한’ 믿음에서 비롯된 태도였을 것입니다.
둘째로, 죽음을 무릅쓰고 왕에게 나아가기로 한 결단 역시 에스더의 ‘단순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답신을 보냈어요. '수사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을 소집해, 날 위해 금식해 달라고 해주세요. 3일 밤낮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고요. 나와 내 시녀들도 여러분과 함께 금식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내가 전하께 나아갈게요. 설사 그게 금지돼 있다 하더라도 말예요. 만약 죽으면, 죽는 거죠, 뭐!'” – 에 4:15~16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의연히 목숨을 내놓았던 수많은 순교자들! 그들이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해답을 히브리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약속 받은 것을 손에 쥐지 못한 채 죽었어요. 그런데도 끝내 믿음을 잃지 않았죠.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약속을 멀리에서 바라보면서 손 흔들어 인사하고는, ‘이 세상은 잠깐 머무르는 곳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에요. 이런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짜 집을 찾고 있다’는 분명한 입장표명을 하죠. 만약 그들이 자기의 옛 고향을 그리워했다면, 원하는 때 언제든지 돌아갔을 거예요. 하지만 그들은 옛 고향보다 훨씬 더 좋은 새 고향-하늘의 고향-을 추구했던 거예요. 자, 이제 알겠죠? 하나님께서 그들을 왜 그리 자랑스러워하시면서, 그들을 맞이할 도시를 준비해 놓고 계시는지 말예요.” – 히 11:13~16
여러분도 에스더를 읽으시면서 에스더와 같이 신앙의 ‘단순함’을 회복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