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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욥기

저는 욥기를 번역하면서 평소에 갖고 있던 몇 가지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1) 하나님은 왜 그토록 “완벽했던” 욥에게 고난을 주셨을까?

영화 ‘Awakenings’에서는 ‘기면성 뇌염’이라는 질병에 걸린 아들을 둔 어머니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정상아를 낳았을 때에는 ‘Why?’라고 묻지 않았어요. 하지만 내 아이가 병이 들었을 땐 ‘Why?’라고 물었죠.”

우리는 살면서 많은 고난과 마주칩니다. 그때마다 가장 먼저 하는 질문이 ‘왜?’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까요? 고난에는 많은 의미가 있겠지만, 욥이 당한 고난은 분명 ‘죄에 대한 징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욥이 갖고 있던 모든 외적 조건들을 다 내려놓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가장 순수하게 하나님을 대면하도록 하기 위한 준비’가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고난당할 때 가장 솔직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마주하게 되니까요.

 

(2) 하나님께서는 왜 욥의 세 친구들을 꾸짖으셨을까?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욥과 세 친구들의 변론! 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욥의 세 친구들의 말에서 오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다 옳은 이야기만 하고 있죠. 하지만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과연 친구들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요?

세 친구들 이야기의 공통주제! 그것은 바로 ‘인과응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 욥이 뭔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받고 있다’는 것이지요.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은 인류의 대부분의 문학작품의 주제입니다. 우리는 그래야만 공정하다는 생각이 들기에, 그런 소망을 담아 이야기를 짓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봅시다. 이 세상 모든 일이 정말 인과응보요, 권선징악으로 결론이 나던가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죠.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이 정말 ‘인과응보’의 원리로만 돌아간다면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 더 나아질까?’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엔 훨씬 더 비참해질 것 같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행실에 따라 곧이곧대로 벌을 받는다면…, 아,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하네요!

 

(3) 그럼 욥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을까?

이렇듯 하나님께서 세 친구는 꾸짖으셨지만, 욥은 인정해 주십니다. 결국 욥의 손을 들어주셨지요. 그렇다면 욥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을까요? 이에 대한 답을 우린 다음 구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가 나에 대해 헛소리를 지껄인 것과, 내게 정직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욥이 기도하면 내가 너희에게 벌을 내리지 않으마. 욥은 너희랑 달랐으니까(욥 42:7~8).”

한마디로, ‘욥은 헛소리를 지껄이지 않았다, 그리고 정직했다’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죠. 욥의 세 친구는 고뇌하는 욥 앞에서 원론적인 이야기, 율법적인 이야기, 형식적인 이야기만 늘어 놓았던 반면, 욥은 하나님께 너무 고통스럽다고, 왜 자기에게서 은혜를 거두셨냐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하나님은 ‘위선적인 모범생’보다 ‘솔직한 문제아’를 더 좋아하십니다. 왜냐고요? 거기에 바로 우리의 ‘진심’이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와 진솔하게, ‘heart to heart’로 만나길 원하시는 거죠.

 

(4) 세상에 의인이 있을까, 없을까?

하나님께서는 욥을 이렇게 평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욥처럼 진실하고, 언행이 일치된 사람도 없지. 욥은 나 하나님한테 온전히 헌신된 사람이야. 게다가 악이라면 진저리를 치고(욥1:8)” 이 구절만 보면 욥은 으레 ‘의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의인은 없다’고 분명히 말하죠(롬 3:10). 그렇다면 의인은 있는 걸까요, 없는 걸까요? 이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다음 구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파티가 끝난 다음 날 아침이면, 욥은 일찌감치 일어나 자녀들 한 명당 번제물 한 마리씩을 바쳤어요. ‘내 아이들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하나님을 거역했을지 몰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욥 1:5).”

잘 아시는 것처럼, 번제를 포함한 구약시대의 모든 제사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즉, 자신의 모든 죄와 허물을 뒤집어쓴 희생제물(예수님)을 대신 죽임으로써 본인은 속죄를 받는 것이죠. 그리고 그 덕에 우리는 하나님께 ‘의롭다’는 평가를 받습니다(Justification稱義).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은 행실이 올바르거나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이 세상에 죄가 하나도 없는, 완전무결한 인간은 없지요. 그래서 성경이 ‘의인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인’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Redemption代贖)으로 칭의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욥은 의인이었던 것입니다.

 

(5) 하나님은 왜 동문서답을 하셨을까?

욥의 질문은 ‘왜 제게 이런 끔찍한 고난을 주셨습니까?’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신 채, ‘당신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 당신의 지혜가 우리와 얼마나 차원이 다른지’만 거듭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이러한 ‘쌩뚱맞아 보이는’ 답변 속에 욥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세상 만물을 하나님이 끊임없이 사랑으로 세심히 돌보고 계시다는 것, 하나님께서 그 돌봄의 손길을 잠시 멈추신 상태-그것이 바로 재앙이라는 것, 욥이 당한 모든 고난이 실상은 우리의 본질-인간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 그렇게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돌봐 주시기에 우리가 생존 가능하다는 것,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실상은 당연한 게 아니라 은혜였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죠.

 

(6) 엘리후는 세 친구들과 무엇이 달랐나?

한편, 욥과 세 친구들간의 논쟁이 끝난 후, 엘리후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길게 일장연설을 하는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이 엘리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을 안 하신다’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엘리후는 잘 한 걸까요, 잘못 한 걸까요?

엘리후와 세 친구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 모두 ‘욥이 범죄했다’라고 주장했다는 점이죠. 하지만 엘리후와 세 친구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세 친구가 ‘욥이 범죄했기에 고난을 당한 것이다’라고 주장한 반면, 엘리후는 ‘욥이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범죄했다’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입니다(욥 34:34~37). 즉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의 처벌에 대해 반항한 것을 지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으니 하나님께서 엘리후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씀을 안 하신 것 같습니다.

 

(7) 그렇다면 욥기의 결론, 욥기의 주제는 무엇일까?

욥기에서는 무려 38장(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뺀 전체)에 걸쳐 길고 장황한 변론들이 펼쳐지지만, 다 읽고 나도 “So what?”이란 석연치 않은 질문이 남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맥과 핵’의 관점에서 욥기를 읽어보면 분명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흐느끼며 눈물지을 때 그분이 내 친구, 옹호자가 되실 테니…! 나, 탄원하리라. 이웃이 이웃을 위해 나서듯 하나님 앞에 인간의 변호인으로 나서시는 그분께…(욥 16:19~21).”

여기에서 ‘친구, 옹호자, 변호인’은 누구일까요?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끝없는 ‘범죄 리스트’를 열거할 때, 예수님이 변호인으로 나서셔서 “하나님, 제가 인간들 대신 모든 죗값을 치렀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더 이상 징벌을 받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라고 변호해 주시니까요(딤전 2:5).

여러분도 욥기를 읽으시면서 우리의 변호자가 되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맘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P.S. 욥기는 원래 ‘운문형식’의 문학장르라고 하죠. 그래서 저도 대부분 운율을 살려 번역하려 노력했습니다. (시인 감성이라고는 1도 없는 제가 나름 애 많이 썼습니다!^^) 그러니 욥기 번역본을 읽으실 때 마치 시조를 읊듯 3·4·3·4의 장단으로 한번 읽어 보세요! 훨씬 정감있게 다가오실 거예요!

시편
시편

장장 150편의 시 모음집인 시편!

그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널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알아?”

그리고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나죠. “하나님을 찬앙하세요! 할렐루야!”

이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이 시편의 모든 내용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즉 ‘하나님이 우릴 너무 사랑하시기에, 우린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지요.

 

전 이번에 시편을 번역하면서 특별히 세 가지 단어가 마음에 와 닿았더랬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①진심, ②의리, 그리고 ③빨리」였지요.

 

① 진심

시편 장르의 양대산맥을 꼽는다면, 그것은 ‘찬양시’와 ‘탄식시’일 것입니다.

‘찬양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때, ‘탄식시’는 ‘하나님의 부재’를 체험할 때 쓴 시라고 볼 수 있겠죠. 하지만 ‘찬양시’든, ‘탄식시’든 그 장르를 초월해, 시편이 우리에게 이토록 감동을 주는 이유는 아마도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시인의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즘 한창 화제를 모으고 있는 챗봇(Chat GPT)에게 제가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기도하는 방법 좀 가르쳐 줄래?” 그랬더니 꽤 길고 수준 있게 대답해 주더라구요. 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제 마음에 와 닿는 한 마디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기도는 진심을 담아 해야 합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시편이야 말로 ‘가식이나 위선, 포장이 없이, 가장 솔직하게 표현된 인간의 진심’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왜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거인 골리앗을 물리쳐서…?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짓겠다는 범국가적 프로젝트를 발표해서…? 그보다는 ‘매 시편마다(150편의 시편 중, 무려 절반 정도를 다윗이 썼다고 하죠) 구구절절이, 애절하게 우러나온 그의 ‘진심 어린’ 고백이 바로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진심 어린’ 사랑의 비결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골리앗과의 싸움’이나 ‘성전건축기획’은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던 원인이 아닌, 결과에 불과했다는 생각도요….

 

② 의리

시편에는 하나님의 ‘faithfulness’에 대한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그동안 대부분의 성경버전들은 이 단어를 ‘신실하심’이라고 번역했지만, 저는 우리 정서에 맞게, 그래서 마음에 확 와닿게 표현하고자, ‘의리’라고 번역해 보았습니다. ‘의리’의 가장 큰 속성이 ‘언제나 변함없는 한결같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리’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가장 확고한 근거라는 생각에 말이죠.

 

③ 빨리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다윗이 이렇게 한국인의 기질을 닮았을 줄은….

다윗이 쓴 시편에 ‘빨리’라는 단어가 정말 엄청 많이 나오더군요. 그만큼 다윗은 늘 가슴 졸이는, 다급하고도 숨막히는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께 구조요청을 했지요.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은 한결같이, 신실하게 응답해 주셨고요.

여러분도 인생길에서 응급상황을 만나면 8282 콜센터에 전화해 ‘빨리’ 구조요청을 하세요! 그럼 하나님이 우릴 그 어려움에서 ‘빨리’ 건져주실 테니까요.

 

***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문학장르 중에 시(詩)만큼 한 단어 한 단어 공을 들여 지은 게 또 있을까요? 그래서 성경 역시, 하나님이 최고로 정성껏 공들여 만드신 작품인 우리 인간을, ‘시(詩, poiema; 엡 2:10)’라 표현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도 메시지 성경의 시편 번역본을 통해 ‘하나님과의 소통언어’로 ‘의리의 하나님’을 만나실 수 있길 기도합니다!

잠언

요즘 ‘영끌’이란 말이 유행하던데, 이게 ‘영혼까지 끌어모은다’란 뜻이라죠? 그런데 잠언의 주제가 바로 ‘지혜를 찾는 데 영끌해라’인 것 같습니다.

잠언에 ‘지혜(호크마חָכְמה, wisdom)’라는 단어만도 54회나 나오지만, 지혜의 동의어로 쓰인 명철(understanding), 분별력(distinction), 통찰력(insight), 판단력(sanity), 지각(good sense), 총명(intelligence), 현자(sage), 신중함(prudence), 지식(knowledge), 상식(common sense) 등의 단어까지 합하면 모두 222회나 출현하기 때문이죠.

잠언이 말하는 지혜가 물론 ‘실용적인 유익을 창출하는 탁월한 지식이나 기술’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지혜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게 훨씬 더 ‘지혜로운’ 통찰일 것입니다.

“만물이 그 분(예수 그리스도)을 통해 창조되었어요. 그 분이 없이 생겨난 건 하나도, 단 하나도 없었죠(요 1:3).”

라는 요한복음의 말씀이

“하나님은 ‘지혜 여사(Lady Wisdom)’와 함께 땅을 창조하셨어. 주님은 ‘통찰력 부인(Madame Insight)’과 함께 하늘을 들어올리셨지. 그녀들은 언제 강들과 샘들한테 ‘지표면으로 올라오라’고 신호해야 할지, 언제 이슬방울들에게 ‘밤하늘에서 떨어져라’고 얘기해야 할지 알고 있었거든(잠 3:19-20).”

이라는 잠언 말씀과 상통하기에 ‘지혜=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한편, 잠언에서는 지혜와 상반되는 개념인 어리석음(케실כְּסִיל, 에윌אֱוִיל, 나발נָבָל, 히브리어)을 멍청함(foolishness), 무모함(recklessness), 무지(simpleton), 고집(headstrongness), 냉소적 태도(cynicism) 등의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역시 IQ가 낮은 걸 말하는 게 아니라, ‘지혜의 부재상태’, 즉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잠언의 메시지 성경 번역본을 통해 잠언이 말하는 지혜-‘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찾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잠언
전도서

잘 아시다시피, 전도서에 가장 빈번히 나오는 단어는 바로 '허무하다(무려 38번!)’입니다.

히브리어 원어로 'הֶבֶל'(헤벨, 수증기)라는 이 단어가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헛되다’, 중국어 성경에서는 ‘虛空’(공허하다), 그리고 메시지 성경에서는 ‘Smoke’(연기)로 번역됐지요.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인간의 3대 불안’으로, 존재론적 불안(죽음에 대한 두려움), 도덕적 불안(죄의식), 그리고 의미론적 불안(공허감)을 꼽았습니다. 이처럼 공허감은 우리 인간에게 근원적 불안을 안겨주는 큰 요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큰 성공을 거두고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재벌들이나 인기절정 연예인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도 다 이러한 공허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인간은 본래 피조물, 즉 불완전한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함께할 때에만 비로소 완전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와 함께 하실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을 떠나실 수밖에 없었고, 그때 인간이 받은 충격은 실로 가공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떠나신 빈 자리가 너무나 컸기에 사람들은 그때 생긴 마음 속 빈 공간을 세상적 쾌락이나, 재물, 명예, 권력 등으로 채우려 애쓰지만,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파스칼은 이걸 가리켜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이 있다’라고 했지요.
 

언뜻 보기에 전도서의 주제가 ‘인생의 무의미함’인 것 같지만, 역설적이게도 저자인 솔로몬은 이를 통해 ‘인생의 참 의미’를 설파합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할 때에만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재차 강조하고 있지요.

 

모든 망상과 환상과 헛소리를 피할 수 있는 견고한 반석이 있지.

그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이야. – 전 5:7

 

평생 수백 번의 죄를 짓고도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는 사람이 있지만 (법꾸라지^^)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경건하게 사는 사람에게

훌륭한 삶이 주어진다’고 확신하네.

악한 사람은 결코 ‘훌륭한’ 삶을 누릴 수 없지.

악인이 제아무리 오래 산다 한들

그건 그저 그림자처럼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삶일 뿐이야.

왜냐고?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네. – 전 8:12-13

여러분도 메시지 성경 전도서를 통해 더할 나위없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전도서
​아가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애초에 사랑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죄와 상처로 얼룩진 우리 인간이 과연 얼마나 깊이, 얼마나 친밀하게, 얼마나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범죄 후,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었던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일 때라야 비로소 완벽한 행복과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창조된 인간이 그때 받은, 그 엄청난 충격, 공포, 트라우마는 아담 이후 모든 인류의 DNA에 깊이 각인되어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버림받음(거절감)’이라는 상처는 우리를 ‘제대로 사랑받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는 존재’로 만들어 옥죄어 왔죠.

이러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실로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죠)은 우리가 받아야 할 징벌을 자청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날마다, 매순간, 친밀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길 원하셨던 거죠.

우리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을 충분히 받은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지요. 그런데 문제는, 비록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깨닫고, 주님을 영접해 구원을 받았다 하더라도, 여전히 죄의 상흔이 남아있는 우리가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 그것도 무조건적으로! 이토록 더럽고, 추하고, 못난 내 모습 이대로! 아무 조건 없이!’라는 사실을 여간해서 믿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경 66권을 통해 아무리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끊임없이 고백하셔도, 우린 그 사실을 믿지도, 기대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가 너무 안타까우셨을 것입니다. “내가 이토록 널 사랑한다는데, 왜 넌 내 사랑을 못 믿는 거니? 내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널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데, 네가 아무리 더럽고 비열하고 추악해도, 그 모습 그대로, 무지하게 널 사랑한다는데, 왜 내 사랑을 믿지 못하고 안 받아주는 거니?” 하나님은 당신의 이런 애타는 마음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알아주길 바라셨기에, 우리에게 ‘아가서’를 주신 게 아닐까요?

보잘 것 없는 신분의 술람미 여인, 그것도 검게 그을려 외모조차 볼품없던 여인을, 당대 모든 이스라엘 여인들의 최고의 우상-그야 말로 ‘백마 탄 왕자님’-이었던 솔로몬이 아무 조건 없이, 그 모습 그대로, 그것도 완전히 홀딱 빠져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술람미 여인은 처음엔 솔로몬의 사랑에 가슴이 설레기도 하지만, 곧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그럴 리가 없다’며 솔로몬의 사랑을 거부하며 피해 다닙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술람미 여인에게 자기의 뜨거운 사랑을 확인시켜 주죠. (그리고 두 사람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그건 바로 하나님의 우릴 향한 그 뜨거운 사랑을 깊이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 마음이 일단 채워지고 난 후에야, 우린 비로소 그 사랑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사랑이 이웃에게까지 흘러갈 수 있는 거고요.

여러분도 아가서의 메시지 성경 번역본을 통해,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이 우릴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지 깨닫고, 그 사랑에 도취되어 행복을 누리며 살아 가시길 축원합니다!

 

P. S. 이번 아가서 번역본은, 정신과 의사이자 내적치유 강사이신 이성훈 교수님과 저의 공저 ‘멈출 수 없는 사랑, 아가서의 사랑 이야기’에서 사용했던, 제 번역본을 살짝 수정한 것입니다.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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