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제가 창세기를 번역하면서 새롭게 느낀 점은 창세기에는 참으로 많은 ‘이름들’이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후, ‘아담’이라 이름지으셨고, 사람에게 처음으로 주셨던 미션도 ‘이름 짓기’였지요. 또 창세기의 수많은 족보들을 통해 수없이 많은 이름들도 등장할 뿐 아니라, 나라에, 도시에, 자기가 하룻밤 묵고 간 장소에, 심지어 우물에게까지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들이 창세기에는 유독 많이 나옵니다. 이렇게 ‘작명’ 사건도 많이 나오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아브라함(열국의 아비)과 사라(열국의 어미)로 바꿔주시는 ‘개명’ 사건도 나오지요.
이런 걸 보면서 저는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이름을 중요시하실까?’ 생각해 봤습니다.
“목자에게는 경비가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지 않소?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데리고 나온다오.”
– 요 10:3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성경, 허계영 번역본)
그리고 ‘이름은 인격이다!’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이나,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들에게는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그저 일련번호를 붙일 뿐이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
이 시에서도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 그를 ‘인격적으로 존중해준다’, 그를 ‘마음으로 사랑한다’란 뜻을 내포하고 있구요.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
이 찬양에서도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아신다’는 것은 ‘날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여기시며, 날 마음 다해 사랑하신다.’는 의미가 들어있지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 사 49:15-16
하나님의 손바닥엔 (손금이 아닌^^) 우리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잊으실 수 없었고,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창세기의 클라이맥스를 22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도 이 부분을 번역하면서 폭풍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지요.)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했어요. “아버지?”
“그래, 내 아들!”
“부싯돌이랑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양은 어디 있어요?”
아브라함이 말했어요. “우리 아들! 번제에 쓸 양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마련해주실 거야.” 그리고 둘은 계속 걸어갔어요. – 창 22:7-8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성경, 허계영 번역본)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실 때에도 이런 심정이셨겠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손바닥에 새기신 우리 이름을 보시고 찢어지는 마음으로 끝내 아들을 보내어 희생시키셨습니다.
여러분, 창세기는 그동안의 메시지 번역본 중, 어떤 책보다도 재미와 감동이 크답니다. 번역자 스스로 이 정도로 강추한다면 한 번 읽어보실 만하지 않을까요? ㅎㅎ
제가 이번에 ‘구속사의 상징’이자, ‘성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출애굽기를 번역하면서 많은 것들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첫째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새삼 알게 됐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 인간들이 그분의 근처에만 가도, 그분의 얼굴만 봐도 바로 죽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죠. 그동안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내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으로 ‘만만하게만 봤던’ 하나님이 이렇게 엄청난 분이셨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면서 다음과 같은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항상 집에서 소꿉장난, 숨바꼭질을 하며 나랑 놀아주시던 우리 아빠를 어느 날 회사로 찾아갔지요. 그런데 어마어마한 고층빌딩의 입구에서부터 삼엄한 경비 속에서, 엄청 복잡한 절차를 거쳐 간신히 들어간 그룹 총수의 사무실, 그곳에서 중역회의를 인도하시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나는 ‘우리 아빠가 이렇게 대단하신 분이었구나! 모든 사람들이 아빠 앞에서 굽신거리네?’라며 적잖이 충격을 받습니다. 그동안 집에서 한없이 낮아지셔서, 내 눈높이에서 나와 놀아주시던 아빠가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었는지… ‘만만하게’ 여겼던 우리 아빠를 다시 보게 됐다는….^^
둘째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을 어떻게 그렇게 변함없는 사랑으로 끝까지 참아줄 수 있었는지, 그 비밀을 알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 부르실 때, 모세는 무려 5번이나 정식으로 거절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만 5번이니, 아마도 실제로는 훨씬 더 많았겠지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자긴 절대 못한다고 끝까지 빼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전혀 화내지도, 나무라지도 않으시고 모세를 사랑과 인내로 달래가며 결국은 변화시키셔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과 인내를 체험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역하는 모습 속에서, 과거 하나님 앞에서 고집 피우던 자기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그 어떤 모습도 참아줄 수밖에 없었겠지요.
셋째는 모세가 갖고 있던 거절감(버림받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는 치유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어릴 적 광주리에 담겨 나일강에 버려졌고, 바로의 궁궐에서 유일한 히브리인으로 성장하는 가운데 갖게 된 뿌리깊은 거절감의 상처를 가졌던 모세! 그는 하나님께 “제발 저희와 동행해 주세요. 저희를 떠나지 마세요!”라고 수없이 매달립니다.
출애굽의 과정에서 그 엄청난 기적들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하나님을 배신해버린 이스라엘 백성과는 ‘동행하지 않겠다, 다 멸해 버리겠다, 그리고 모세의 후손으로 새로운 민족을 만들겠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푸념에 (전 하나님의 이 푸념들이 하나님의 진심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속상하신지, 얼마나 상처받으셨는지, 그 마음을 토로하신 하나의 표현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모세는 또 다시 버림받을까 봐 너무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강청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하나님께 확인받기를 무한반복합니다.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매달리는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전혀 책망치 않으시고 “그래, 걱정하지 마, 내가 같이 가줄게. 내가 널 떠나지 않을게.”라고 재차 확신시키시며 모세의 상처를 치유해 주십니다.
출애굽기의 전반부는 10가지 재앙과 갖가지 기적들 이야기가 나오면서 마치 무슨 모험담을 읽는 듯 흥미롭지만, 후반부는 각종 율법과 계명들, 그리고 성막 건축에 대한 내용들로 뭔 소린지… 지루하셨던 게 사실일 겁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보다 편한 한국어로 번역하려 애썼고, 모든 계량 단위들도 우리에게 친숙한 단위들로 다 바꿔봤습니다. (덕분에 계산기 많이 두드렸어요!^^) 그리고 너무 생소하게만 여겨졌던 성막의 구조나 기물들, 예복들을 보다 쉽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그림 자료들을 많이 넣어봤습니다.
그동안 전반부만 흥미진진하게 읽다가 후반부에서 집중도가 떨어지셨던 분들, 이번 번역본으로 출애굽기를 새롭게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레위기라면 ‘딱딱한 법률’ 또는 ‘법규 위반 시의 징벌’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하여 썩 즐겨 읽지 않는 게 사실이죠. 하지만 이번에 제가 레위기를 번역하면서 새롭게 깨달은 점은 다음과 같답니다.
-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만큼은 누가 봐도 ‘아, 쟤네는 하나님 표네?’라고 바로 알아볼 정도로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길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상위 0.0001%에 속하는 상류층 부모가 자녀들을 귀족학교에 보내어 우수하고도 특별한 엘리트 교육을 받게 함으로써 자녀들도 자기들처럼 상위 0.0001%에 들기를 원하는 것처럼 말이죠.
-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자녀가 밖에 나갈 때 계속해서 ‘차 조심해라, 나쁜 친구 사귀지 말아라,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일찍 들어와라’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이 악한 세상에서 보호하시길 원하셨던 거죠. (그래서 저는 레위기의 문체를 가급적 '자상한 아빠의 부드러운 말투'로 번역하려 애썼습니다.)
-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너무도 악하고 약하기에 이 모든 율법들을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 대신 징벌 받는 희생양으로 삼으셨습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수많은 제물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할 뿐이니까요.
-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잘 되라고 노심초사 잔소리(?)하시고, 행여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을 떠날까 봐 애태우며 신신당부하셨지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나고 말았습니다. 처음부터 이러한 슬픈 결말을 예측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다짐하십니다. “그래도, 그래도, 내게 돌아오기만 한다면 난 너희를 다시 받아줄 거야. 너희를 절대 버리지 않을 거야….”라고 말이죠.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요. 그래서 저는 레위기의 핵심 구절이 26장 40-45절이라고 생각합니다.
40-42 “하지만 그들이 만약 자기 죄를 고백하고, 자기 조상들의 죄를 고백한다면, 자기들이 반역과 배신을 행했다는 것, 그리고 나를 대항했기 때문에 원수의 땅으로 쫓겨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의 완고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부드러워져 자기 죄에서 돌이킨다면, 난 야곱과 맺었던 언약을 기억할 거야. 이삭과 맺은 언약을 기억할 거야. 그래, 아브라함과 맺었던 내 언약을 기억할 거라구. 내가 그 땅을 기억할 거야.
44-45 하지만 그들이 그런 악행을 저질렀다 손 치더라도, 그래서 원수의 땅에서 사는 동안이라도, 나는 그들을 거부하거나 혐오하거나 완전히 없애 버리진 않을 거야. 그들과 맺었던 언약을 파기하진 않을 거라구. 나는 하나님, 바로 그들의 하나님이니까. 그들을 위해 내가 그들 조상들과 맺었던 언약을 기억할 거야. 모든 나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싶어서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온 장본인이 바로 나니까. 나는 하나님이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택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해 주셨던 것입니다! 왜냐구요? 위의 말씀처럼 그분은 너무너무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싶으셨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고 나오셨으니까요!
여러분도 깊어가는 가을 날, 레위기를 읽으시면서 구절구절마다 흠뻑 배어 있는 하나님의 그 뜨거운 사랑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민수기(民數記)’라는 제목은 광야생활 40년을 시작하면서, 그리고 마치면서 인구조사를 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죠. 그리고 그 사이에는 광야생활 중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별의별 이야기들이 다 들어 있구요. 출애굽 후, 가나안 입성까지 40년간 겪은 좌충우돌 광야 방랑기! 이 이야기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천국에 입성하기까지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점점 더 깊이 알아가고, 하나님과의 신뢰를 점점 더 깊이 쌓아가는 과정으로 이해되기도 하는데요, 저는 이번에 민수기를 번역하면서 우릴 향한 하나님의 마음 몇 가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것은…
우선, ‘내 자식은 내가 지킨다!’라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와 뜨거운 사랑이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당시 ‘영빨 좋기로’ 유명한 무당, 발람을 데려다가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고 뇌물공세를 펼칠 때, 하나님은 발락과 발람의 그 어떤 모략과 술수에도 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저주를 결국 축복으로 바꿔 주시죠. 그런데 그 일이 있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속을 어디 보통 썩였나요? 틈만 나면, ‘애굽에서 잘 먹고 잘 살던 우리를, 왜 굳이 끌고 나와 이 고생을 시키느냐?’라고 원망해대던 이스라엘 백성들, 애굽의 압제와 핍박에 그토록 시달리던 자기들에게 ‘노예해방’이란 엄청난 선물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그 은혜를 잊고는 오히려 ‘그때가 좋았지’라며 적반하장, 배은망덕의 태도로 일관하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종종 징계하셨지요. (그런데 그 징계의 수단이 대부분 ‘전염병’이었다는 사실 아세요? COVID-19의 재난을 맞고 있는 우리에게 뭔가 경각심을 주시는 듯…)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일 듯 일어났다’라는 표현이 민수기에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모를 정도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 때문에 속 깨나 썩으셨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대적이 당신 자녀를 저주하고 음해하려 할 때엔, 절대 수수방관의 자세로 좌시하고만 계실 수 없으셨습니다. 우리도 자녀들을 종종 징계하지만, 남들이 내 자녀를 해치려 할 땐, 절대 가만히 안 있죠. 그게 바로 부모의 사랑이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릴 향한 하나님의 징계도 사랑이요, 보호와 축복도 사랑임을 이번 번역 과정을 통해 찐~하게 깨닫게 되었답니다.
또한, 가나안 입성 직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내가 너희에게 줄 땅은 이렇단다’라고 하시면서 동서남북 경계선을 자세히 말씀해 주시는 장면, 그리고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면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해. (그렇게 나랑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자꾸나^^)’라고 하시면서 여러가지 주의사항(계명)들을 주시는 장면을 번역할 때엔,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장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자녀가 원하는 선물을 준비해 놓고, 자녀가 얼마나 좋아할지 상상하며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 흥분을 감출 수 없는 아빠! 자녀의 눈을 손으로 가린 채, 선물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는 아빠의 그 기쁨과 기대감! 드디어 자녀의 눈에서 손을 떼고는 ‘Surprise!’를 외치는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아빠의 사랑! 바로 그러한 기대감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함께 들어가시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에게 이 선물을 주시기 위해 얼마나 오래 준비하셨나요? (아브라함 시대부터 모세 시대까지 무려 600년간이나!) 그렇게 오래 준비하시고 기다리신 만큼, ‘개봉박두!’를 앞두고 기대와 기쁨도 그만큼 크셨으리란 생각이 이번에 번역 작업을 하면서 새로이 들더군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큰 선물을 받고도 한 세대를 못 가, 어느새 하나님을 배신하고 말지만요. ㅠㅠ)
여러분도 민수기를 읽으시면서, 패륜아 같은 우리의 모습과 상관없이, 무조건 우리 편을 들어주시는 아버지, 그리고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하며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성경 속 인물을 찾아가 설교를 들을 수 있다면, 누구의 설교를 가장 듣고 싶으신가요? 물론 1위는 예수님이겠지만, 2위는 아마도 모세가 아닐까요? 성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모세처럼 하나님을 직접 대면으로 만나 (‘대면 만남’이 어느새 아련한 추억이 된 요즘엔 더 큰 의미로 다가오네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대로 전한 설교자는 없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으니까요(신 34:10). 그런데 굳이 타임머신을 타고 가지 않더라도, 모세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신명기를 읽으시면 되죠! 모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간곡히 신신당부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했던 설교 세 편이 바로 신명기니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세 편의 설교를 통해 가나안 입학을 위한 필수과목 세 개를 이수했습니다.
-
역사학(과거): 신 1:1~4:4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
-
법학(현재): 신 4:44~26: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시는 일
-
미래학(미래): 신 27:1~34: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실 일
여러분, 혹시 자신의 절친 A에게 또 다른 절친 B를 소개해 준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때 한편으론 ‘내가 좋아하는 A와 B가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도 들지만, 다른 한편으론 ‘혹시 둘이서 너무 친해져 날 소외시키면 어떡하지?’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잖아요? 하나님이 딱 그런 심정이셨던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축복의 땅, 가나안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오래전부터 약속하셨고, 이제 그 약속을 막 실행하시려는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그저 조마조마하기만 합니다. ‘혹시 내 백성이 가나안 땅의 축복들에 도취되어 날 잊으면 어떡하지?’란 마음 때문이셨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반복, 또 반복해 말씀하십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더라도 날 절대 잊으면 안 돼!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꼭 기억해 주렴! 그리고… 너희도 날 그렇게 사랑해 주면 좋겠어!”
그리고 한 가지 말씀을 덧붙이시죠.
“난 너희가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그 행복의 비결을 가르쳐 줄게. 바로 내 계명들을 지키는 거란다.”
신명기에는 정말 많은 율법과 계명들이 나오죠. 제가 이번에 신명기를 번역하면서 든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어릴 때부터 철저히 율법 교육을 받은 상태에서, 정말 독하게 마음먹으면 구약에 나오는 613개 조항의 율법을 딱히 못 지킬 것도 없겠다’란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못 지킵니다만, 강한 의지력 상위 0.1%에 드는 사람들 얘기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부자 청년이 와서 이렇게 얘기하죠.
또 하루는, 한 남자가 예수님을 가로막고 여쭤봤어요. “선생님, 영생을 얻으려면 무슨 선행을 해야 하나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왜 내게 선행에 대해 질문하는 겐가? 선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네. 만약 하나님의 생명에 들어가고 싶거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잘 지키게나.”
그 남자가 물었어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말하지 마라. 부모님을 공경해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해라.”
그 젊은이가 말했어요. “전 그 모든 걸 다 지켰는데요. 그거 말고 또 할 게 있나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어요. “만약 자네가 가진 것 전부를 드리기 원한다면, 자네 재산을 다 팔아서 전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게. 그럼 자네 재산은 다 하늘나라로 송금된 거라네. 그리고나서 나를 따르게나.”
이럴 수가! 그 얘기만큼은 듣고 싶지 않았는데…! 젊은이는 완전 꼬리를 내리고, 풀이 죽어 떠났어요. 젊은이는 그 많은 재산의 노예가 되어, 차마 그걸 놓을 수 없었던 거예요.
– 마 19:16~22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 허계영 개인번역)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대표적인 율법 몇 가지를 제시하시자, 청년은 의기양양하게 말합니다. 자기는 그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이죠. 전 이 대답이 (적어도 자기 수준에서는) 거짓말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청년은 어릴 때부터 철저히 율법교육을 받았고, 최선을 다해 율법을 지키며 살아왔을 테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준법정신에서 커다란 허점을 지적하십니다. (이런 걸 사자성어로 寸鐵殺人이라고…^^)
“자네가 적어도 외적으로는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는 거, 나도 인정하네. 하지만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은… 글쎄…? 모든 율법의 가장 중요한 정신인 이 ‘사랑’에 관한 율법까지 과연 잘 지켰는지 생각해 보게. 만약 그렇다면 자네 전재산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기부하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겠군?”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율법의 근본 정신(법의 정신 Spirit of the Law)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외적인 행위로만 율법을 지켰다면서 자기의(自己義)와 교만에 빠져, 우리의 본질인 죄인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죠. 하나님께서 가장 경계하시는 게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겐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전혀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구원받을 유일한 기회를 놓치게 되니까요.
여러분도 신명기를 읽으시면서 그 긴 설교문과 그 수많은 율법 속에 구구절절이 배어 있는, 우릴 향한 그 깊은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렇게 우리에게도 사랑받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절절한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